“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 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그의 아버지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아 있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요한복음 4:46-54).

"당신의 스승은 어떤 기적들을 행했습니까?" "당신의 나라에선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소원을 들어 주시면 그걸 기적으로 여기지만 이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그것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앤소니 드 멜로의 『일분 지혜』에 수록된 이야기입니다. 기적에 대한 이해는 복음 이해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적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적이 하나님의 능력을 시험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매우 초보적인 신앙이거나 아예 기독교일 수 없습니다. 진짜 기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이 부어졌고,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만 찾는 왕의 신하

왕의 신하는 자기 아들을 살려 주실 분을 제대로 찾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몰랐습니다. 다만 아들을 살리려는 마음에 험하고 먼 길을 걸어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단순히 병자를 치유해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니라, 인류의 죄를 속량하실 구세주요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공간을 뛰어넘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들이 누워 있는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시기를 청했으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

매정하게 들릴 수 있는 이 말씀은 기적만을 구하는 왕의 신하에게 믿음을 주시려고 하신 말씀입니다. 기적 신앙은 초보적인 신앙에 지나지 않습니다. 함량미달의 신앙입니다. 그런 왕의 신하에게 온전한 믿음을 주시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주어에 해당하는 "너희는"은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대상은 왕의 신하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고 두 가지 헬라어 부정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도무지는 그것을 번역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표적과 기사를 보지 않으면 절대로 그리고 결코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한 기적을 보고서야 당신을 환영하는 갈릴리 유대인들 때문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기적에만 매달리는 그들의 초보적인 믿음을 안타깝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는 다른 공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 놀라운 모습으로 변화하신 다음 아래로 내려오셨을 때,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예수님께 달려와 제자들이 쫓아내지 못한 귀신을 예수님께서 직접 쫓아내 달라고 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선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막 9: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기적만을 찾는 이들이 답답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내면적인 신앙보다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외적인 것들을 구하기 일쑤입니다. 기적을 구하지 않는다 해도, 끊임없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간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 체험한 것만 믿으려 한다면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없습니다. 사실 영적인 것은 우리가 다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기적에서 신앙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기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기적 기사들을 보면 하나같이 치유된 사람들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치유하신 후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막 5:34),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마 8: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상의 기적

우리는 일상 속의 수많은 기적들에는 무심하면서 특별한 기적만을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죽을병에 걸렸다가 나으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다고 말하지만, 평생 아프지 않고 아무런 사고 없이 잘 지낸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더 감사한 일인지 생각해 봅시다.

중국에는 편작과 화타라는 유명한 의사들이 있었습니다. 화타는 관우를 치료했기 때문에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만 편작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편작은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말을 들을 만큼 의술이 뛰어난 의사였습니다. 그에게는 형이 둘 있었는데 그들 또한 의사였습니다. 한 번은 위나라 왕이 편작에게 물었습니다. "그대 집안 삼 형제 가운데 누가 가장 실력이 좋은가?" "큰형의 의술이 가장 뛰어나고, 다음은 둘째 형이며, 저는 형제들 중 가장 뒤떨어집니다."라고 편작은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그대의 형들은 왜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은가" 하고 위나라 왕이 물었습니다. "큰형은 환자가 아프기 전에 얼굴빛만으로 그 환자에게 닥쳐올 병을 알아내 병의 원인을 제거해 줍니다. 닥쳐올 고통을 미리 제거했다는 것을 환자들은 실감하지 못합니다.“라고 편작은 대답했습니다.

위왕은 둘째 형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둘째 형은 환자의 병세가 경미할 때 그 병을 알아보고 치료합니다. 그래서 환자들은 둘째 형이 자신의 큰 병을 미리 다스려 주었다는 것을 모릅니다.”리고 편작이 대답했습니다. 다시 위왕이 편작에 대해 묻자, 편작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환자의 병이 커지고 고통으로 신음할 때에야 비로소 병을 알아봅니다. 병세가 심각하므로 진기한 약을 먹이고, 살을 도려내는 수술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행위를 눈으로 확인하고 제가 큰 병을 고쳐주었다고 믿습니다. 제가 명의로 소문나게 된 것은 이처럼 하찮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는 편작의 이야기에서 어리석은 인간들의 한계를 봅니다. 하나님에 은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기적들에 대해서는 인식하지도 못하고 무심합니다. 그러다가 위험에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리다 겨우 살아나면 비로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법석을 떱니다.

신학자 칼 라너는 기적을 믿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적에 의존해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명의이신 하나님을 믿으려 하지 말고 일상 속에서 기적을 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성숙할 것입니다.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

감사가 넘치면 그것을 실제로 표현해야 합니다.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감사를 표하는 것은 다릅니다. 복음서에도 감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열 명의 문둥병자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병을 고쳐달라고 청했고 병이 나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제사장을 찾아가 몸을 보이고 병이 나았음을 인정받으라고 하였습니다.

문둥병자 열 사람은 주님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다시 찾아와 감사를 표명한 사람은 사마리아인뿐이었습니다. 실제로 감사를 표한 나병환자는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이라는 더 큰 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감사를 표하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갓 도착한 성도가 베드로의 영접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성도에게 하늘나라를 두루 구경시켜 주었습니다. 두 사람은 커다란 작업실에 들어섰습니다. 베드로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습니다. "여기는 접수처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온갖 청원을 이곳에서 접수합니다." 수많은 천사들이 세상 도처에서 보내온 두툼한 청원서들을 분류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나와 두 번째 방에 들어가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여기는 포장하고 발송하는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보낼 은혜와 축복이 이곳에서 포장되어 지상의 청원자들에게 발송됩니다." 이 부서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천사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작업실 한쪽구석에선 천사 하나가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확인처입니다." 베드로가 일러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왜 이리 한가하지요?“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서글픈 일입니다. 지상의 사람들은 부탁한 축복을 받고 나서 확인서를 보내는 일이 거의 없답니다."

히스기야 왕은 죽을병에 걸리자 벽을 보고 통곡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의 기도를 가상하게 여기셔서 15년간 더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렵게 주어진 15년을 헛되이 낭비했습니다. 병이 걸리기 전에는 훌륭한 왕이었지만 병이 나은 이후에는 그 체험으로 인해 교만해져서 남유다를 멸망으로 이끈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원하는 것들을 구하기 전에 무엇이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감사는 내적인 태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주어진 것에 감사드리고 기뻐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것, 가지지 못한 것에 눈길을 돌린다면 그것이 주어진다고 해도 감사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불러오지만 불평은 더 큰 불평을 불러올 뿐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였던 스펄전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촛불을 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별빛을 주십니다. 별빛을 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햇빛을 주십니다. 또한 햇빛을 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천국의 빛을 주십니다.”

헨리 나우엔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를 황홀하게 하는 것은 내가 감사하기로 결심할 때마다 감사해야 할 새로운 것들을 매우 쉽게 발견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낳듯 감사는 감사를 낳습니다.”

기사와 표적을 구하는 초보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구원의 참된 기쁨 속에서 일상이 기적임을 발견하는 성숙한 신앙인의 길로 우리 모두 들어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기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기적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기적을 구하기를 바랍니다. 일상에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참된 구원의 삶은 기쁨과 감사입니다. 날마다의 기쁨과 감사로 가득찬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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