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Spirituality 65

 “십계명 묵상” 다섯 번째 시간인 오늘은 부모 공경에 대한 말씀을 함께 묵상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이 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두 가지의 이유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축복의 대리자

먼저 십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복이란 땅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는 장수의 축복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아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신 5:16). 왜냐하면 부모님은 하나님의 축복을 전해 주는 통로이고, 축복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하나님 축복의 대리자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부모님을 통해서 생명을 전달받는 축복을 누립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스스로 생명을 이루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우리가 피조된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분들입니다.(김용규, 『데칼로그』)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는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고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을 배우게 되고, 이것은 또한 하나님 앞에서 피조된 자로서 교만함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배우도록 초대됩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전달하는 축복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험악한 세상에서 우리를 안전하고 평안하게 길러 주시는 축복을 주었습니다. 고대 교부인 어거스틴이 젊은 시절 방황할 때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아들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를 드립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모니카의 마을 신부님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눈물로 기도한 자식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 말에 모니카가 큰 위로를 받습니다. 우리는 부모님의 눈물의 기도 때문에 복을 받습니다. 부모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우리를 험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길러주시고, 눈물의 기도를 드리며 우리에게 축복을 전달해 주신 분들입니다. 부모님은 축복의 통로이고, 축복의 대리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복의 대리자인 부모님을 공경할 때 계속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전달받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가 공경할 때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제는 부모님에게 우리의 공경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부모 공경의 계명은 안식일 계명과 함께 ‘무엇을 하라’라는 긍정적인 계명입니다. 십계명의 다른 여덟 가지의 계명들은 모두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계명들입니다. 구약성서 학자 월터 부르그만은 이 점에 주목하면서 안식일 계명과 부모 공경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에 담긴 정신 가운데 하나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생산하려는 욕망에 대한 저항입니다. 쉼은 끊임없이 이익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달려가는 욕망을 내려놓을 때 가능합니다. 이러한 욕망이 우리를 쉬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부모님을 공경하지 못하게 합니다. 월터 부르그만에 따르면,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부모님이 더 이상 생산과 이익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연세 드시고 힘이 없는 부모님들은 생산할 능력이 없는 돌봄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무언가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들이 무시 당하고 버림 받는 이 사회 속에서 부모님들이 바로 무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문화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곧 사람은 생산과 이익의 문제로 그 가치를 판단할 존재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제 우리의 부모님들은 우리의 공경과 돌봄을 마땅히 받아야 할 분들임을 가르쳐 줍니다. 부모님들은 그분들의 몫을 다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의 돌봄과 공경을 받으셔야 할 때입니다.

정호승 시인이 쓴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 마디』에는 홀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던 청년이 교통사고를 당해 두 눈을 잃게 되었습니다. 청천벽력같은 일이 벌어져 이 청년은 큰 상실감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쪽 눈을 기증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청년은 그렇게 크게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두 눈을 다 기증받고 싶은데, 왜 기증자가 한 쪽 눈만 기증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도 홀어머니가 옆에서 “얘야, 한 쪽이라도 어떠냐? 그래도 수술을 받으려무나” 간청해서 아들은 이식 수술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수술을 마치고 붕대를 풀던 날, 이 청년은 눈물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한 쪽 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기증받은 눈은 바로 어머니의 것이었습니다. 울고 있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두 눈을 다 주고 싶었지만, 이 다음에 앞 못 보는 애미를 네가 돌봐야 할 것을 생각하니 그럴 수 없었단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 부모님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모두 자신의 눈 하나를 빼어서 우리에게 주신 분들입니다. 두 눈을 모두 주고 싶지만, 그러면 앞 못 보는 자신을 돌보는 것이 아이들에게 짐이 될까봐, 그것까지 생각하면서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마지막 것까지 내어 주신 분들이 우리의 부모님입니다. 한 쪽 눈까지 내어주신 부모님들이 이제는 일할 수 없다고, 더이상 우리에게 줄 것이 없다고 무관심한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내어 주신 부모님을 우리가 돌보고 공경해야 할 차례입니다.

영혼을 낳으시는 부모님

부모님을 공경하면 우리에게 또 다른 유익이 찾아옵니다. 바로 부모 공경을 통해 사람 사는 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김기석 목사의 『오래된 새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교우 가운데 연세 많은 권사님 한 분이 노환으로 자녀들의 돌봄을 받고 계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목사님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님, 하나님하고 친하시지요? 하나님께 부탁해서 저 좀 빨리 데려가라고 해주세요. 왜 나같이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을 그대로 두시는지 모르겠어요. 무엇보다도 자식들 보기 민망해서 못 견디겠어요.” 자녀들이 어머니를 돌보면서 수고하는 것을 이분이 너무 미안해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이 권사님을 이렇게 위로했다고 합니다. “권사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세상에서 쓸모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권사님은 지금 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형편이지만, 자식들은 병든 어머니를 돌봐드리면서 사람 사는 도리를 배우는 거예요. 모든 것을 쓸모 있고 없고로 판단하는 세상에서 그렇지 않은 관계도 있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 복 아니겠어요? 권사님의 병든 몸조차 아드님과 며느님에게는 복이에요. 권사님은 지금도 그분들의 영혼을 낳고 계시는 거구요. 그러니 다시는 하나님께 떼쓰지 마세요.”

이 이야기의 마지막 표현이 인상적입니다. “권사님은 지금도 자녀들의 영혼을 낳고 계시는 겁니다.” 처음에는 자녀들에게 육신의 생명을 낳았던 것처럼, 이제 몸이 병들어 누워 있는 어머니는 자녀들의 영혼을 낳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자녀들이 어머니를 돌보면서 사람 사는 도리를 배우고, 그 속에서 그들의 영혼이 더욱 고귀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공경을 받으시는 부모님은 우리의 영혼을 낳고 계시는 분입니다. 힘 없고 병든 부모님을 돌보고 공경하는 자녀들은 그들의 영혼이 고귀해지는 축복을 받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고보면 존 칼빈이 말했듯이 부모 공경의 제5 계명은 결국 자녀들의 유익을 위한 계명인 것이 틀림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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