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한복음 5:1-18).

절망의 사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요즘 이삼십 대 젊은이들의 자살률이 급격히 상승하였습니다.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보지만 대학을 졸업할 때쯤이면 이미 엄청난 금액의 빚을 진 채무자가 됩니다. 그런데 정규직 일자리를 얻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리는 젊은이들에겐 대출금을 갚고 결혼 자금을 마련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일이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 절망의 사람들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복음은 절망의 사회, 절망의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희망이 되는 해방의 소식입니다.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새로운 사회가 인류가 존재하는 시공 안에서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바로 복음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담지하고 복음을 보여 주어야 하는 교회가 사회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리는 정치인들처럼 복음을 개인적으로 환원해 버리는 우를 범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되지 못하고 자살을 택할 정도로 끝자락에 몰린 사람들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영혼만을 구원하는 불완전한 진리의 조각이 아닙니다. 진통제나 마약은 더더욱 아닙니다.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 경쟁 대열에 낄 수 없는 사람들,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과 어울려 한바탕 신명 나는 모꼬지를 벌임으로써 세상 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해주는 희망의 등불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세상을 꿈꾸셨으며 몸소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이며 대안적인 세상입니다.

축제를 완성하시는 분

요한복음을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시기가 축제 때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첫 번째 예루살렘 방문은 유월절이었습니다(2:13). 두 번째 방문은 5:1에 나오는데, 그냥 "명절이 있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초막절이었고, 네 번째는 수전절이라는 성전 봉헌과 관련된 축제의 기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은 다시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분은 유월절 엿새 전에 예루살렘과 인접해 있는 베다니아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 즉 축제 때 예루살렘을 방문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축제를 완성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의 가장 큰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가장 먼저 유대인들의 축제를 완성하심으로써 당신이 메시아임을 드러내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삶이 축제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축제를 완성하신다는 이 메시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선 축제일이 명시되지 않고,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대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축제일인 안식일을 완성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유대인에게 안식일은 매번 축제의 날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좋은 음식을 준비해 놓고 서로를 축복하고 감사하면서 안식일을 보냅니다. 세상의 압제에서 해방되었음을 상징하기 위해 노예들이나 짐승들까지 일에서 해방되는 날입니다. 모든 유대인들이 축제를 지킬 수 있도록 안식일 전에 과일이나 생선 등을 가난한 사람의 몫으로 남겨서 안식일 음식을 준비할 수 있게 합니다. 축제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율법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유대교에는 크게 두 종류의 축제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고, 다른 하나는 절기로 지키는 명절들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수전절은 4대 명절입니다. 그들은 절기로 지키는 명절을 '절기 안식일'이라고 부릅니다. 안식일이 그들의 기본적인 축제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모든 축제의 표본입니다. 안식일에 이루어지는 예배와 봉헌은 다른 모든 축제의 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칠월 곧 그달 일일로 안식일을 삼을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아무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레 23:24-25).

복음은 모든 이들을 축제로 초대하는 초대장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지금 이곳,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부터 한바탕 모꼬지를 벌이자는 것입니다. 해방의 기쁜 소식은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며, 모든 이들이 함께 어울려 신명나는 축제를 벌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모꼬지를 벌이는 희망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기를 쓰며 살아가게 합니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고 그저 눈앞에 보이는 이익과 쾌락만을 추구하기에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 확고하게 믿는 돈 되는 일만을 하며 악착같이 다른 이들과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멈춤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면밀히 살피고, 얼마나 헛된 삶을 살고 있는가를 자각하고, 복음이 말하는 축제의 삶, 모두가 어우러져 한바탕 신명나는 모꼬지를 벌이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은 모든 축제를 완성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지나가는 길목마다 병자들이 치유함을 받고, 가난한 자들이 먹을 것을 공급받으며, 눌린 자들이 해방되고,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사회에 합류하는 현상들은 모두 그분이 벌이는 신명나는 모꼬지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주님의 그 일에 초대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길 바랍니다.

세상의 축소판 벳세다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벳세다라 불리는 못이 있었습니다. 그 못에는 행각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에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사람 등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나았습니다.

벳세다 못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여러 개의 문 가운데 하나인 '양 문' 근처에 있었습니다. 이 문은 성전을 둘러싼 벽의 북동쪽에 있었습니다. '양 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 문으로 희생제사에 쓸 양들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양문 곁에 벳세다 연못이 있었습니다. 못의 크기는 축구장 정도, 깊이는 6미터 정도였습니다.

(이 연못은 벳세다 혹은 베데스다라고 불립니다. 필사본마다 다르게 쓰여 있습니다. 권위 있는 사본들과 쿰란 문헌에 '벳세다'라고 쓰여 있어서 많은 경우에 벳세다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벳세다는 '올리브의 집', 베데스다는 '흘러넘치는 집'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축제를 완성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려면, 먼저 벳세다에 대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축제가 많이 열려도 참된 축제는 열릴 수 없습니다. 그 이유를 벳세다가 설명해 줍니다.

왜 그토록 많은 병자들이 벳세다 행각에 모여 있을까요? 그들은 천사가 내려와 연못의 물을 휘저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못 속으로 들어가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병이든 나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연못에 첫 번째로 뛰어드는 한 사람만 그 열망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벳세다는 선착순의 논리가 지배하는 곳입니다. 한 사람의 승자만을 위한 곳입니다.

특히 중환자들에게 그 연못은 희망의 자리가 아닙니다. 움직임에 지장이 없는 가벼운 환자들에게만 기회가 있을 뿐입니다. 벳세다는 겉보기에는 은총과 희망의 자리이지만 실제로는 절망의 자리입니다. 또한 벳세다는 분열과 갈등의 자리입니다. 다들 아프다보니 다른 이들을 측은히 여길 마음의 여유가 없는 곳입니다. 벳세다는 승자독식의 무한경쟁을 상징합니다. 오직 1등만 살아남고 2등조차 기억되지 않는 곳, 그것이 바로 벳세다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벳세다 못가에 누워 있는 수많은 병자들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언제인지 모르는, 천사가 나타나 물을 동하게 하는 그 막연한 때를 기다리지만 막상 그런 순간이 찾아오면 가장 먼저 물에 뛰어들 수 없는 절망의 상황에 처해 있는, 그러면서도 벳세다를 떠나지 못하는 병자들의 모습은 희망 없이 살아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온 인류의 모습입니다.

벳세다에 오신 예수님

바로 그런 벳세다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분이 벳세다에 오신 것은 희망 없는 사람들도 함께 축제를 즐길 수 있는 하나님 나라를 열어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공회대 김기석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결심하지만 그중에 일부만 진짜로 시도하며, 시도한 사람 중에 일부만 자살에 성공한다. 그러니 하루에 43명이 자살한다면 지금 우리 주위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시도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겠다는 결심을 한 채로 돌아다니고 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좌절감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막말로 오늘 죽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눈에 뵈는 것이 뭐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소위 ‘묻지마’ 폭행이 늘고 있는 이유이다. 그러니 자살률이 높은 사회란 얼마나 위험한 사회란 말인가? 나아가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다만 우리의 안전을 위해서만 아니라 절대적 절망감에 빠져 바람 부는 절벽 위에 서있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 그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 생명인지, 얼마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영혼인지를 안타까워하며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예수께서는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베짜다 연못가의 병자처럼 세상에서 좌절한 사람들, 문둥병자와 같이 낙오한 사람들에게 왜 그리 못났냐고 꾸짖지 않으셨다. 무조건 그들을 품어 주고 위로해 주고 치유해 주어 마침내 새로 일어설 희망을 주셨다. 오늘도 수많은 한국교회의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들은 세계 최고의 자살률을 자랑하는 이 나라의 밤하늘을 무심한 듯 무감한 듯 말없이 비추고만 있다."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복음을 위해 살겠다고 뛰어든 사람들이 자신만의 성채를 더 높이 더 웅장하게 세우는 동안, 복음은 빛을 잃고, 복음의 수혜자가 되어야 할 사람들은 희생 제물이 되어 세상에 바쳐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벳세다에 오셨습니다. 그분이 그곳에 오신 이유는 단순히 병자 하나를 치유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분이 필요하다는 현실을 자각하게 함과 동시에 우리가 그분처럼 절망의 사회에 등불이 되어야 함을 말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박해의 상황을 피해 달아나는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베드로가 버리고 떠나가는 로마를 향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향해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쿠오바디스 도미네)"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가던 길을 돌아서서 로마로 돌아가 주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을까요?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그분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두려운 일이지만 이미 그 고통을 경험한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던 베드로에게 들려온 내면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의 그 음성을 들을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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