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로마서 10:8).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내게 얼마나 가까이 계신가이다. 열왕기상 19:11-12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바람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고,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고, 불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다. 오직 세미한 음성을 통해 말씀하신다. 문제는 지금 내게 이런 세미한 음성이 들리고 있는가, 내 환경이 지금 그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는가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책 『하나님의 음성』에서 ‘세미한 음성’의 의미를 ‘메시지를 전하는 매체의 겸손한 조심성’이라고 말하며, 겉으로 특별한 것이 없고, 눈에 띄지 않는 음성이기 때문에 우리가 발견하기 힘들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사야 58:9에서, 하나님은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문제는 어떤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고 있느냐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같은 책에서 프레드릭 마이어의 말을 인용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생각과, 인간의 칭찬과 인정을 얻으려는 동기와, 자기를 나타내려는 목표가 조금이라도 있는 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할 것이다.’

요한복음 14:26를 통해서 주님은,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제는 우리가 지금 성령이 오시도록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는가이다.

물론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역사하셨다. 야곱에게는 사다리를 내려주셨고, 요셉에게는 꿈으로 보여주셨고, 모세에게는 불타는 가시떨기에 나타나 이리로 가까이 오라고 직접 말씀하시기도 했고, 로뎀나무 아래서 잠자던 엘리야에게는 천사들을 보내 먹여주시기도 했고, 요나를 고기 뱃속에 집어넣었다가 빼기도 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과 직접 이야기하셨고, 떡을 떼어 축사하셨고, 의심 많은 도마에게는 직접 몸을 만지도록 허락하셨다. 베드로에게는 직접 사랑의 확약까지 받기으셨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 후 2천 년이 지나도록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완벽한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미련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완벽하고 안전한 세상에 대한 환상으로 온 세상을 전쟁과 폭력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작금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집중해 듣기란, 마치 날뛰는 미친 개들 앞에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워졌다. 세상은 시끄럽고 복잡하고 정신 없어졌고, 우리의 본능과 욕구 역시 이런 격정의 한복판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이런 와중에 우리들의 분별 여정은 지속되어야 하지만, 예전 제자들에게 직접 나타나셨고, 직접 물으셨고, 떡까지 직접 떼어주신, 친절한 하나님은 지금 없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9에서 말한 바와 같이, 비록 주님이 보내 주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 해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할 정도이다. 하지만 본문 13:12에서 바울은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들의 분별은, 자끄 기예 신부의 말대로, ‘더듬어 알아가는(groping)’ 수준에 불과하다.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주님을 따라 산으로 올라간 베드로가 주님이 변형되시고, 주님과 엘리야와 모세가 서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짓겠다’고 공언했을 때, 그에게 들려온 하늘의 목소리는 ‘맑은 하늘’에서가 아니라 형체를 알 수 없는 ‘자욱한 구름 뒤’에서였다(막 9:2-7). 우리가 온전히, 완전히 아는 것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이다. 그때에는 우리가 우리의 눈으로 ‘선명히’ 주님을 보게 될 것이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계 1:7).

여전히 우리의 지상에서의 삶 가운데 가라지가 같이 자라고 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가라지를 주님이 허락하셨듯이(마 13:24-30), 우리의 분별은 결코 완전하지도 못하고 완벽히 선명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대적인 분별의 결과에 대해서, 비록 그 결과에 우리 인간들의 의지와 욕구가 반영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크게 개의치 않으실 것이다. 지난 수천 년 간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과 같이 살아오는 데 많이 익숙해지셨을 터이다. 하나님이 신경 쓰시는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더 잘 알아가는 자녀로서 성장하는 일일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과정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길 바라시지, 우리가 분별의 결과에 목숨 걸지 않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결코 완벽주의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때로는 적당히 유연하길 바라신다.

그러니 전지전능하시고 모든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가 이 직업을 고르든 저 직업을 고르든 무슨 차이가 날까? 변호사가 되든 청소부가 되든 미술가가 되든? 이 집을 사든 저 집을 사든 무슨 차이가 날까? 이 교회를 다니든 저 교회를 다니든? 유리성 같은 교회와 다락방 교회의 차이는? 또한 가정교회는? 아니면 이 남자와 저 남자의 차이는?

잊지 마라!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분별이나 결정의 최종 결과보다 과정이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하라”(마 5:48)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치 우리가 ‘지금 여기서’ 완전해야 된다는 상태의 권고로 해석해 지레 포기해선 안 된다. 이 말씀은 리차드 윈터가 그의 책 『지친 완벽주의를 위하여』에서 통찰력을 가지고 지적한 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명령하실 때 사용하신 동사의 시제는 미래형이다. 완전하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 목적이며 지금 당장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즉 우리의 이생의 삶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이고, 이런 성숙의 ‘과정’이 중요하다. 윈터는 불가능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가 지치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라, 노력하는 가운데 진정한 기쁨을 느끼고 상황에 따라 정확하지 못하고 좀 부족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는 건강한 완벽주의자가 되라고 권고한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이때 더욱 빛이 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상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어떤 과정을 겪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지금 우리는 변화되어 가고 있다는 마음 자세를 가지고, ‘지금 여기서’ 하나님과 분별의 여정에 함께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고로 이생은 의가 아니라 의의 성장, 건강이 아닌 치유와 회복, 완성된 존재가 아닌 되어가는 존재, 휴식이 아닌 연습의 시기다. 우리는 아직 미래의 모습을 향해 자라가고 있고, 그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계속되고 있다. 즉 이생은 목적지가 아니라 길이다.”(『지친 완벽주의자를 위하여』중 마르틴 루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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