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면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께 무엇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그의 모든 길은 정함이 없습니다”(약 1:5-8).

다른 복음

오세용이라는 분이 쓴 글 "빈손 대신 헌금 들고 나오라?"의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어떤 어머니 이야기입니다. 환우 한 분이 하소연하기를 자기 아들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돈이 붙지를 않는다."는 말끝에, "교회에 헌금을 인색하게 하니, 돈이 붙을 수 있겠느냐"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깜짝 놀라 무슨 말씀이냐고 물으니까, "생각해 보시라, 하나님에게 심어야 열매가 맺을 것인데, 헌금을 심어야지, 심은 대로 나고 뿌린 만큼 거둔다는데, 다만 얼마씩이라도 일천번제 하는 정성이 있으면, 분명 하나님이 재물을 허락하실 것인데" 하는 이야기에, 제가 놀라 기절할 뻔했습니다.

너무 성급한 결론인지 모르겠지만. 그분은 교회에 나가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성을 다해 치성 드리면 복 받는다는 식의 미신을 믿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그분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언뜻 보면 그렇게 보이는 많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일천번제도 그중에 하나이고, 또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말씀 역시 헌금용으로 사용됩니다. 이런 말씀에다가 흔히 "뿌린 대로 거두리라"고 말해지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는 말씀과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배의 결실(막 4: 20)"을 거둔다는 말씀도 오용되고 있으며, “두 렙돈 헌금한 과부(눅 21:1~4)의 헌금 이야기”까지 덧붙여지면,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져 버립니다.‘

이 글에 나오는 어떤 어머니 이야기는 사실 교회 안에서 흔히 접하는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무의식 안에는 그 어머니와 같은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으로 각색한 아전인수 격의 이러한 논리들은 복음을 왜곡하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복음, 다른 예수님, 다른 기독교를 만들어냅니다. 김형국 목사는 잘못 전해지고 있는 기독교 복음들을 모아 『교회 안의 거짓말』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른 복음에 빠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경고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1:9b).

일차적으로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에게 잘못이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 역시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말대로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 저주란 복음이 가지고 있는 복된 소식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힘이 되어야 하는 복음이 시험과 고난 앞에서 무용지물이 되고,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누려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것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어려움을 겪을 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다른 복음을 믿고 있는 것임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참된 복음과 신앙은 인생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입니다. 힘든 세상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줍니다.

시험을 당할 때

야고보는 시험을 당해도 낙망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 근거들을 가장 먼저 제시했습니다. 시험을 당해 힘들지만, 실은 그것이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시험에 처한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의 온전케 하시는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통해 인내가 솟아납니다. 인내하는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온전함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일의 우리는 오늘의 우리와 다를 것입니다. 우리는 온전해집니다. 신비한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그러나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역사 속에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해도 어려운 현실이 욱죄어 오면 우울해집니다. 피조물의 입장에서 천 년이 하루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현실로 받아들이기란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인내를 솟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험을 겪는 신자의 입장에서 해야 할 일이 있고 깨달아야 할 일이 있고 결단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처방을 먼저 제시한 야고보는 이제 시험을 당하고 있는 신자가 해야 할 지침을 말해줍니다. 시험의 근본적 원인에 대해 하나둘씩 보여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먼저 지혜에 대해 말하고 다음으로 기도를 언급하고 마지막으로 나뉜 마음, 곧 두 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해 인내해야 하는 수신자들에게 매우 결정적인 내용들입니다.

정말 부족한 것

5절에서 '지혜'라는 주제가 소개되는 방식은 흥미롭습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에서 부족하다는 말은 바로 위 4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족함이라는 개념을 이어 받고 있습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부족함이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대의 교훈적인 글들에 쓰인 전형적인 문학적인 기교이기도 합니다.

4절의 부족함은 인내의 결과를 표현하지만 5절의 부족함은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리킵니다. 즉 아무것도 부족함 없는 온전한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인내의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부족함을 채워야 합니다. 시험은 우리를 어렵게 만들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 줍니다. 자신 속에 있는 탐욕이나 시기, 질투, 헛된 욕망, 부족한 인격, 부족한 믿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첫 번째로 지혜를 꼽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시험을 당하고 있는, 믿는 자들에게 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야고보서에서 지혜, 즉 "소피아"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3장 후반부에서 야고보 사도는 '위로부터 난 지혜'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지혜를 구분합니다(15-18).

하지만 여기서 지혜를 구하라고 하는 이유는 직접적으로 시험을 당하는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시험의 한가운데서도 기뻐할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당하면 부족한 것들이 드러납니다. 돈이 없고, 상황이 안 되고, 인격이 부족하고, 실력이 모자랍니다. 하지만 정말 부족한 것은 하나님의 뜻, 곧 이 일을 통해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의도를 아는 지혜입니다.

그걸 모르면 시험을 당해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 기쁨으로 인내할 수 없습니다. 시험 중에 부족한 것들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실망과 좌절만 깊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있다면, 문제를 풀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진정한 기쁨이 생깁니다.

지혜

신앙생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막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 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가까이 계십니다. 물론 토기장이의 손을 떠나 토기는 불가마 속에 던져집니다. 하지만 그분의 세심한 손길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불가마는 정말 견딜 수 없지만, 진흙이 그릇으로 빚어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그분이 주시는 인내로 견딜 수 있습니다. 시나브로 단단하고 아름다운 그릇이 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병은 무지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성숙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흙이 도자기로 변하지 않습니다. 성숙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신앙은 '앎'을 요구합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묵상하고 기도하고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시험을 통해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역사의 원칙과 도리를 발견해야 합니다. 용서하라고 하시면 용서해야 합니다. 믿고 맡기라시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뛰어내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와 같이 피땀을 흘리며 고민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마침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내 뜻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뜻을 따를 때, 그 시험은 더 이상 우리를 힘들게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온전한 세상으로 귀중한 한 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 죽음은 십자가입니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았습니다. 정말 죽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죽을 수 없는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세상의 저항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며, 그렇게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시험 속에 있습니까? 지혜를 구하십시오. 어떤 시험이든 하나님과 상관없고, 신앙의 성숙과 상관없는 시험은 없습니다. 말씀이 요구하는 것, 내 안의 성령께서 요구하시는 것, 우리를 빚으시는 아버지께서 요구하시는 것,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그것을 따르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순종이며 기쁨에 도달할 수 있는 영적인 비결입니다. 참된 복과 진정한 자유는 우리가 거기에 이를 때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지혜, 위로부터 온 지혜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우리에게 그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고난을 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우리가 심각한 고난을 당하고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첫 번째 십자가보다 더 무거운 두 번째 십자가를 지는 사람처럼 참을 수 없이 괴로워한다. 하지만 어떤 것도 우리를 막을 수 없다. 진실한 사랑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며 자신을 의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자들이다. 십자가는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니다. 거기서 고난 가운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감당하는 자는 더 이상 '내'가 아니다."(프랑수와 페넬롱, 『그리스도인의 완전』 p.158)

페넬롱의 글에서도 시험을 만나 온전히 기뻐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렇게 온전하고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에게 정말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지혜입니다. 마귀로부터 오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복음은 듣기 좋은 음악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수고 빻아서 고운 입자로 만들어 물을 붓고 치대어 반죽한 후 물레에 돌려 성형하고 유약을 바른 후 모든 것을 불가마 속에 넣어 빛나는 도자기로 만드는 변화로의 초대입니다. 그 초대에 기꺼이 응하여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지혜가 주는 평화 가운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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