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9:1-38

소돔의 멸망은 미리 예견되었다. 창세기 13장에서 롯이 삼촌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 근처로 갔을 때, 소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고 평가했다. 문학적 한 단위로 이해되는 18장에서도 소돔의 멸망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중요한 이야기 주제였다.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함께 취급하지 않으실 것을 아브라함이 확신했다면, 과연 열 명의 의인이 소돔에 있을지 궁금한 마음으로 본문을 읽게 된다. 과연 소돔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두 가지는 의로운 롯의 구원과 소돔의 멸망이다.  확실히 롯은 창세기 14장에서 북방 왕들에게 포로로 끌려갔던 위기의 순간을 반전의 기회로 삼은 듯하다. 소돔 근처에서 살던 그가 19장에 이르러 보니 소돔 성안에 들어가 사는 모습이다. 게다가 천사들이 방문한 그때 롯은 성문에 앉아 있었다. 보통 고대 근동에서 성문은 사업을 추진하거나 법적 문제 해결을 위해 재판할 때 사용되던 일종의 공공장소였다. 롯이 왜 성문에 앉아 있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지만, 9절에서 소돔 사람들이 분노하며 롯에게 던진 말이 어느 정도 롯의 일상적인 역할을 반영한다고 볼 여지가 있다. 소돔 사람들은 롯을 거류민 주제에 그들의 법관이 되려 한다고 비난한다.  소돔에서 롯은 상당히 형통한 시간을 보낸 것 같은데, 롯의 형통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까지 롯의 모습은 대체로 부정적이

다. 그런데 벧후 2:7-8에선 롯을 의인이라 부른다. 하나님께서 롯의 어떤 점을 복되게 여기셨고, 사도 베드로는 왜 롯을 의인이라고 불렀을까? 확실한 것은 롯이 소돔의 멸망으로부터 구원받을 믿음과 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본문과 18장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두 이야기 모두 방문자 영접으로 시작한다. 아브라함은 세 명, 롯은 두 명의 천사를 영접했다. 두 사람 모두 천사들에게 나아가 절을 했고, 집으로 모셔들였다. 심지어 롯은 집에 들어가길 거절하는 천사들에게 계속 간청해 집으로 모셨다. 소돔 성안 광장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는 걸 인지해 돕고자 하는 롯의 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브라함 이야기와 유사성은 있어도, 영접의 차원은 달랐다. 아브라함은 달려가서 영접했고, 롯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영접했다. 아브라함의 경우 세 방문자가 기쁘게 초청에 응했지만, 롯의 경우 처음에는 거절했다. 아브라함은 염소를 잡고 세 스아나 되는 곡식으로 빵을 만들어, 천사들의 식사를 완벽하게 수종들었지만, 롯은 천사들을 위해 간소한 식탁을 베풀었고 무교병을 구웠다. 급한 상황이라 무교병만 구운 것이라 볼 수 있지만, 본문의 내러티브는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영접하는 사람도 오직 롯 혼자이다. 롯의 영접이 아브라함의 영접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고, 그가 소돔 성안에 살고 있었지만, 소돔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의를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소돔 사람들의 죄악은 무엇일까? 창세기 18:20은 소돔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죄악이 심하다고 언급한다. 같은 맥락에서 19:13도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다고 말씀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르짖음은 폭력에 희생당한 약자들의 울부짖음이다. 이는 형에게 죽임 당한 이후 땅으로부터 아벨의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소돔의 멸망 이유를 동성애에서만 찾는 것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 소돔 사람들이 와서 두 천사를 상관하려 했다. 히브리어 동사 야다(안다)로 표현했는데, 단순히 통성명하려는 의도가 아님이 분명하다. 롯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두 딸을 내보내겠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안다’라는 말을 성적인 부분을 포함하는 말로 이해했으리라 본다. 그래도 소돔의 멸망 이유를 동성애에 국한시켜선 안 된다. 성경 전체에서 소돔의 멸망을 자주 언급하는데, 성경이 자주 언급하는 심판의 이유들은 주로 우상숭배, 하나님에 대한 반역, 거짓 선지자, 교만, 음행, 사회적 불의, 살인 등이다. 동성애를 하려던 사람들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소돔 사람들이 모두 롯의 집앞에 모였다는 사실이다. 본문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소돔 사람들이 어린 아이부터 어른까지, 가까운 곳부터 마을 끝까지 다 모였다고 강조한다(4절). 게다가 악행을 그치라고 막아선 롯에게 사람들은 폭력을 행사하려 했다(9절). 소돔 사람들이 모두 악한 일에 동의하고 이방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소돔의 타락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지 오래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천사들은 롯에게 소돔의  멸망을 선언했고, 가족을 데리고 신속하게 피신할 것을 명했다. 이 말을 들은 롯은 즉각 그 말씀을 믿었고, 아내와 딸들 그리고 예비 사위들을 찾아서 심판에 대해 설명했으나, 사위들은 그저 농담으로 여기고 웃어 넘길 뿐 롯을 따르지 않았다. 롯의 사위들이 보여준 “웃음”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 앞에서 보였던 불신앙적인 “웃음”과 맥락을 같이 하는데, 여기서 웃는다는 표현은 강세형으로 비웃음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롯은 성안에 있던 가족들과 일행까지 구원하기를 원했으나 아내와 두 딸만이 그를 따랐다.

소금기둥

소돔의 멸망은 긴박하게 진행되었다. 성경에 시간의 흐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날 낮에 천사들은 아브라함과 식사를 나눴고, 저녁에 소돔 성안으로 들어갔으며, 다음 날 새벽 동이 틀 때 소돔은 멸망당했다. 소돔이 멸망하던 날 밤, 사태가 긴박한데도 롯은 머뭇거렸고, 천사들이 무려 일곱 번이나 서두를 것을 명령했다. 장소적 배경도 11-16절 사이에 계속 바뀌어 그 밤의 긴박함을 잘 설명한다. 천사들은 긴박함 중에도 롯이 소돔을 떠나기 전까지는 심판을 행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의인과 악인을 함께 멸하지 않도록 간구했던 것과 같다(창 18:23-25). 천사들은 롯과 그의 아내와 두 딸의 손을 붙잡고 강권하여 성밖으로 데려 갔다(16절). 롯은 심판의 심각성과 긴급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도 부족해 멀리 도망가다가 죽을까봐 가까운 소알 땅을 요청했다. 아브라함과는 달리, 롯은 소돔을 위해 간구하지 않았고, 소알 땅을 구할 때도 소알 땅의 불의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작은 곳이라는 말만 반복했다(창 14:2, 8). 그래도 하나님은 롯을 향해 자비를 베풀길 그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롯의 부족한 청원을 다 들어 주셨고, 롯이 소알에 들어갈 때까지 아침이 되도록 심판을 유예하셨다. 롯의 안전이 확보되자, 하나님께서 불과 유황을 비처럼 내리셨고, 결국 소돔은 멸망하고 말았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 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 이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야기의 흐름상 그녀가 소알 땅으로 들어간 이후일 것이다. 또한 심판에 대한 궁금증이라기보다 미련이 남아 되돌아본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7:28-32에서 마지막 때를 언급하실 때 소돔과 고모라를 예로 드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세상적인 욕심에 뒤를 돌아보는 것은 의인의 삶이 아니다(히 10:39).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다. 떠나온 세상에 대한 욕심과 동경은 항상 우리를 뒤돌아 보게 만드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일이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에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이 지으실 터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 의인의 삶이다(히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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