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과 수도사 이야기

악마들이 ‘어둠의 왕자’를 찾아가 불평을 늘어 놓았습니다. “2년 동안 사막에 사는 어떤 수도사를 유혹했습니다. 돈으로, 여자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으로 유혹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사탄이 말했습니다. “너희들은 어떻게 유혹하는지를 모르는구나. 날 따라와 어떻게 하는지 잘 보아라.” 악마들은 거룩한 수도사가 사는 동굴로 날아갔습니다. 사탄이 수도사의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네 친구 마카리우스가 방금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로 선임되었다네.”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도사는 하늘에 대고 원망을 하더니, 마침내 그의 영혼을 잃고 말았답니다.

위의 이야기는 교회의 전통으로 내려 오는 유명한 질투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사랑하길 원합니다. 인간은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인정하고 싶어합니다. 소위 나르시시즘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긍정하고, 인정하고 싶은 욕망을 자기와 비슷한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을 통해 이루고 싶어 합니다. 다시 말해,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과 비교하고 그들의 성취를 반영하면서 자기자신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수도사도 자기 친구가 주교로 선임되었다는 소식에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고, 친구의 성취를 반영하여, 자기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불편한 마음에 질투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심리학자 테서는 질투의 이유를 ‘자기평가 유지모델(SEM: Self-Evaluation Maintenance Model, 1988)’로 설명하였습니다.

왜곡된 자기애의 표현들

자기애(自己愛)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행위”입니다. 자기애는 필요한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기애는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입니다. 정신의학자 스캇 펙은 그의 유명한 책, 『끝나지 않은 여행 Further Along the Road Less Traveled』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문제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비록 문제가 있고 부족해도 자기를 사랑해야 한다고 스캇 펙은 말합니다. 자기를 스스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줄 압니다. 자기를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존귀하게 여길 줄 압니다. 질투의 심리적 배경에는 “스스로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마음, 자신 없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즉 자기애가 결핍된 행태가 질투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왜곡된 자기애가 질투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왜곡된 자기애는 지나친 자기도취로 나아갈 수 있고, 다른 이를 향한 질투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자아도취형 자기애의 전형이 구약의 요셉입니다. 야곱은 12명의 아들 중 요셉을 특별히 사랑하여 채색 옷을 입혔습니다(창 37:3) 채색 옷은 구별된 존재, 귀족적인 대우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부모까지 그의 발 아래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은 그의 꿈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하고 또 했습니다. 광야에서 형들은 일을 하는데, 요셉은 장신구를 단 채색옷을 입고 형들에게 갑니다(창 37장) 요셉의 이런 행위와 태도는 요셉의 자기애적 성향, 자기도취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결국 형들의 시기와 질투를 유발하고 맙니다.

한편 왜곡된 자기애는 질투/시기로 나아갑니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사랑하고 싶은데, 타인과의 비교 과정에서 타인이 더 낫다고 느껴지면 자기를 상실해 버립니다. 성서에서 질투의 대표적인 인물은 사울입니다. 사무엘상 18장에 사울의 질투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인들은 덩실거리며 노래를 주고 받았다. ‘사울은 수천을 치셨고, 다윗은 수만을 치셨다네!’ 사울은 이 말이 비위에 거슬려 몹시 화를 내며 투덜거렸다.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죽인 공을 돌리고 나에게는 고작 수천 명을 죽인 공밖에 돌리지 않으니 왕의 자리마저 그에게 돌아가겠구나.’그날로부터 사울은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다”(삼상 18:6-9).

사울은 비교 과정을 통해 다윗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영어 성경 NIV에는 “And from that time on Saul kept a jealous eye on David.”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은 질투의 눈으로 다윗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다윗과 비교하면서, 즉 스스로 타인에게 주목함으로써 자기 상실에 빠지게 되었고, 이 왜곡된 자기 상실로 인해 멸망하고 맙니다.

왜곡된 자기애는 동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왕비 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비는 요술 거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왕비는 자기를 스스로 사랑합니다. 자기를 스스로 뽐냅니다. 왕비의 하루는 요술 거울에게 질문하면서 시작됩니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요술 거울은 대답합니다. “왕비님, 왕비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고 가장 고우시고,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녀는 이 말을 듣고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요술 거울의 대답이 달라집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은 백설공주입니다.” 그때부터 백설공주에 대한 질투에 눈이 먼 왕비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잊고 자기를 상실합니다. 백설공주를 죽이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합니다. 사냥꾼을 끌어들이기도 했고, 독이 묻은 빗을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급기야 독이 든 사과를 먹였지만 마법의 거울은 언제나 같은 답을 내놓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은 백설공주입니다.” 왕비는 온갖 추악한 짓을 하다가 스스로 무너져 버립니다. 왜곡된 자기사랑은 질투로 이어지고, 질투는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감정으로 변합니다.

질투는 나의 힘!

우리들은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질투는 우리의 원소이고 세포인 것입니다. 질투는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이고, 본성인지도 모릅니다. 그 질투/시기의 감정을 응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며, 질투를 느낄 때 어디로 그 감정의 기운, 그 감정의 에너지를 흘려 보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질투는 ‘나도 사랑받고 싶고, 나도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그 욕망이 다른 이를 향해 파괴적인 에너지를 발생할 때, 질투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질투의 감정이 느껴지더라도, 자기자신을 위해 생산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면, 질투는 나의 힘, 나의 창조의 에너지가 됩니다.

나 스스로를 더욱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다시 시작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타인의 성취를 자기자신의 것과 비교하면서 타인을 깎아내리기보다, 그를 축하해주면서, 나 자신의 성장과 성취를 위한 디딤돌로 삼으면 됩니다. 타인의 승리를 인정하고, 나 스스로를 위한 도약의 기회로 삼으면 됩니다. 질투의 감정은 자기애의 발로(發路)이며, 나 자신을 다시 사랑하기 위한 출발의 신호탄이라 여기면 됩니다. 질투에는 힘이 있습니다. 질투는 에너지입니다. 그 질투가 우리들을 성장시키는 힘이 되기를 빕니다.

“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기형도 시인의 ‘질투는 나의 힘’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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