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면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주실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주께 무엇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으로 그의 모든 길은 정함이 없습니다”(야고보서 1:5-8).

자유를 향한 영적 여정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은 자기의 소설쓰기를 바늘로 우물 파듯 인내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오르한 파묵처럼 인생에서 무언가를 이룩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인내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그 과정에서 겸손을 배우고 자유를 찾았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의 과정을 거치면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면서, 자신이 의식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조금씩 성장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파묵의 소설 쓰기보다 수십 배 혹은 수백 배 더 느리고 더 힘든 것이 바로 믿음의 성장이며 영적인 성숙입니다.

믿음에는 천재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섰다 하면 넘어지는 것이 믿음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쉽게 오남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도, 성공도, 방언과 기적적인 치유까지도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통념이 되었습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세상을 통제할 수 있게 된 인류가 이제 믿음까지도 통제함으로써 믿음의 근본적인 실체를 부인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의 교회들에서는 참된 믿음을 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9:32)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자유의 의미를 압니다. 무엇이 헛된 것이고, 무엇이 허망한 것인가를 압니다. 그들은 주어진 인생을 새롭게 삽니다. 진리가 이끄는 대로 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주어진 모든 시험들을 기쁘게 여기며, 시험을 통해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진리를 위로부터 난 참된 지혜로 받아야 합니다.

중세의 신비주의자이며 위대한 영성가인 에크하르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도달하는 과정은 영혼에 무엇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묻은 그 무엇을 털어내는 것이다." 믿음이란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자유를 향해 가는 영적인 여정입니다. 야고보 1:5-8에서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

야고보 사도는 인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기도하되 특별히 '깨닫는 은혜', 즉 지혜를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런 지혜를 얻지 못하면, 자신이 무엇 때문에 시험에 빠지게 되었는지, 그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께 어떤 답을 드려야 하는지 알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를 위해 "하나님께 구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해서 얻는 지혜는 당연히 "위로부터 난 지혜"(3:17)일 것입니다. 그런 지혜는 어떤 시험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화평 가운데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18).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가능한 모든 것들을 시도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기도를 뒤로 미루곤 합니다.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이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간구한다는 것은 마음이 이미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분

야고보 사도가 염두에 둔 가장 큰 시험은 9-11절에서 언급하게 될 '물질적 부에 대한 동경'에서 오는 시험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물질적 부를 동경함으로써 야기되는 질시와 차별, 공허한 말과 상처 주는 말들, 서로를 판단하고 심지어 재판정에까지 가는 불상사 등 물질적 시험 전체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5절의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되 특별히 지혜를 구하라고 당부하는 것은 이들이 당면한 문제들 앞에서 하나님의 대답을 구하는 자세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놓여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야말로 '후히 주시고 거절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사방이 막혀 있는데도 하나님께 구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욕심과 다툼을 통해서 얻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는다는 사실 속에 그들의 병이 숨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러한 병증을 지적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깨뜨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원하는 것들을 주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다. 도리어 후히 주시고 거절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당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결코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으십니다. 꾸짖지 않으십니다.

여기서 사용된 '후히'의 헬라어 '하플로스'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풍성하게, 주저 없이, 관대하게'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분은 망설임 없이 넉넉히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시험에 든 사람들은 그 사실을 망각합니다. 시험에 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고 마는데, 그것이 우리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자 실수입니다.

'하플로스'의 또 다른 의미는 '순수하게'입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그분은 무엇을 주면서 장부에 적어 놓거나 조건을 달지 않으십니다. 순전한 마음으로 넉넉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 이상의 어떤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악한 사람을 평가절하하고 자기보다 선한 사람을 경원시하거나 질시합니다. 그런 인간의 한계를 하나님께 투사합니다.

두 마음 - 시험의 뿌리

하나님의 순전하시고 넉넉하신 모습은 시험에 들어도 시험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그들은 우선 스스로 의심을 합니다. "의심하는 자"의 헬라어 '디아크리노메노스'는 '스스로 판단 받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판단 받는 자는 결국 두 마음, 즉 '나뉜 마음'(튀크로스)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은 넉넉하고 순전한 하나님의 모습과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여 순전하십니다. 전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향하여 아까운 마음을 품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은 오롯이 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시험에 흔들려 나뉜 마음을 갖게 된 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 풍조나 유행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두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스스로 판단 받고, 신앙 양심에 스스로 정죄 받는 상태에 있습니다. 인내를 따라 열매 맺는 쪽으로, 그 목적을 향해 정해진 방향으로 꾸준히 정진할 수 없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마십시오”는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 의심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기 방법대로, 즉 시기와 분과 다툼으로 얻고자 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달라고 구하는 마음은 나뉜 마음입니다. 세상을 붙들고 있는 마음입니다. 한쪽 발은 스스로 불 속에 놓고, 하나님을 향해 다른 한 발을 내딛은 채 자신을 구해달라고 간청하는 셈입니다. 그것이 두 마음, 곧 스스로 판단 받는 심령입니다. 이 문제가 실은 시험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엑소도스

헬라어로 '출애굽'은 '엑소도스'입니다. '엑소도스'는 '엑소'와 '호도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엑소'는 ~로 부터, 즉 영어의 'from'에 해당합니다. '호도스'는 '길', 영어로는 'way'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엑소도스'는 그동안 살아 왔던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길로 나아감을 뜻합니다. 과거의 삶의 양식과 인생관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양식과 인생관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세상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따라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엑소도스'가 시사하듯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떠나야 합니다. 과거의 인습과 자아를 버려야 합니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무엇을 더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안주해 왔던 세상 중심의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뻐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스승이 말했습니다. "보는 것이네." "무엇을 보는 것입니까?" 제자가 다시 묻자 스승은 말했습니다. "성공의 공허함을, 명예의 허망함을, 인간 노력의 무력함을." 그러자 제자는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비관이고 절망이네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스승은 "아니지. 그것은 푸르른 창공으로 비상하는 독수리의 자유스러움이고 신명이지."라고 응수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라 무언가를 움켜쥐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인생의 어려움들은 우리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우리의 녹을 벗겨내는 제련과 정련의 과정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양성되는 신앙의 학교에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여러 가지 시험들은 이수해야 할 필수 학점들입니다. 신앙의 학교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해야 합니다. 그래도 견디기 어려울 때는 그분은 우리가 견딜 만큼만 시련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은 실수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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