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로 젖은 날씨가 내 마음을 헤아린 것일까. 달리는 차의 운전석 옆에서 뿌연 안개 속에 지금 만나러 가는 분의 얼굴을 그려 본다. 침대에 누워 튜브로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그분은 눈을 뜨고 계실까? 30년 전의 나를 알아보실까? 손을 잡고 "사모님! 저 왔어요." 하면 하얗게 바랜 얼굴에 웃음기가 뜰까? 아니면 눈을 감고 미동도 안하실까? 많이 보고 싶었는데, 늘 아껴 주고 사랑해 주셨는데…….

고마웠다는 말도 제대로 전하지 못한 아쉬움을 가슴 한구석에 담고 살아왔다. ‘사모님, 제발 눈을 떠보세요. 그리고 한 마디라도 해주세요.’

차는 펜실베이니아 주경을 넘어 뉴저지에 들어섰다. 옆에서 말없이 차를 몰고 가는 머리가 희끗해진 막내아들 승국 씨를 본 것도 30여 년이 된 듯하다. 60년도 말부터 70년대에 이르러 시카고에는 한국에서 이민 온 가족들이 한 집 두 집 모여들기 시작했다. 66년에 그 땅을 밟은 나는 교민들의 원조격이었다. 얼기설기 알게 된 유학생 세 명과 목사님 두 분, 그리고 우리 부부 합쳐 일곱 사람이 주일이면 어느 건물의 빈방을 빌려 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목사님은 미리 준비해 두신 찬밥과 묽은 뼛국물로 우리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셨다.

이듬해 우리 집 세 아이들이 이름표를 목에 걸고 어느 유학생을 따라 부모 곁으로 왔다. 아이들의 목에 걸린 이름표를 풀어 주며 한 해 동안 목메던 그리움도 함께 풀었다. 그 후 독일에서 광부, 간호사 출신의 성실한 젊은이들이 우르르 몰려왔고 유학생들도 교회로 찾아들었다. 분위기는 점차 활기차게 되었고, 만나면 서로 외국 생활의 고달픔과 외로움을 털어놓으면서 각별한 정을 쌓아갔다. 그 뒤 YMCA 방을 빌려 주일예배를 드리다가 도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4층 건물을 구입할 정도로 교인수가 늘어났다.

40대의 사모님이 네 자녀를 데리고 시카고에 오신 것은 70년대 초반이었다. 이화여대 약학과 1회 졸업생이라는 그분은 나보다 8,9년 연상이셨다. 예쁘장하고 교양미가 풍겼지만 그늘진 표정은 목사님을 먼저 보내신 탓이리라. 청소년 사랑이 남다르셨다던 목사님은 대광고등학교 교목으로 계시면서 한국에 ‘보이 스카우트’를 처음 도입하신 분이었지만, 병약하셔서 일찍 천국으로 가셨다고 한다. 사모님은 생계를 위해 식품점을 내셨고 도우미도 없이 손수 김치를 담아 파셨다. 한국식품점이 귀한 때라 멀리서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가게는 늦도록 열려 있었다. 영업은 잘 되는 것 같았지만 힘든 일거리가 많아 중노동에 익숙하지 못한 그분은 늘 피곤한 기색이었다. 네 자녀들을 돌보며 생계를 꾸려가시던 그분의 어려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중에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땅에 와서 제일 피해를 입은 사람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막 사춘기에 들어선 막내아들이었던 것 같다. 사모님은 공부 잘하던 아이가 미국에 와서 바보가 되었다고 안타까워하셨다. 몸은 쑥쑥 자라는데 의사소통이 안 되어 제때에 교육을 못 받아 정신적 성장이 멈춘 듯한 느낌의 갈등 상황에도 착한 아들은 고생하는 엄마를 보며 불평을 안했다. 혼자서 얼마나 답답하고 좌절감에 몸부림쳤을까.

교회에서 사모님은 자주 옆자리에 앉으셨다. 여전도회 일을 위해 우린 머리를 맞대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어 성공적으로 행사들을 이끌어 갔다. 남편이 먼저 귀국하여 세월이 버거웠던 내게 그분은 큰언니 같았다. 우리가 서로의 마음을 섞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밤이면 링컨 거리에 있는 24시간 영업하는 팬케이크하우스에 마주 앉아 삶의 갖가지 이야기를 쏟아내며 서로 위로하며 다독여 주었다. 특히 목사 사모로서 가난했지만 더 없이 행복했던 이야기들은 감동적이었다.

몇 년 후 손재주 좋으신 사모님은 식품점을 정리하고 편물점으로 생업을 바꾸셨다. 편물기계를 들이고 고급스럽게 짠 작품들을 쇼윈도에 그림처럼 진열해 놓으셨다. 베스트, 재킷, 테이블 커버 등. 그 가운데 눈에 띄는 하얀 드레스가 있었다. 그 드레스는 높은 가격 때문인지 좀처럼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비닐 커버를 쓴 채 가게 안에 오래 장식되어 있었다. 그해 성탄절, 예쁘게 포장한 하얀 드레스는 내게 선물로 전달되었다. 아, 이 옷, 무릎을 살짝 가리는 길이에 폭넓은 소매는 손목 바로 위까지 오는 기장이 내겐 맞춤복이었다. 품위와 멋을 갖춘 드레스. 내 옷장에서 가장 빛나는 그 옷을 나는 주일에만 입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내겐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교직 생활을 하면서 힘들었던 석사 과정을 끝내고 남편과 합류하기 위해 16년 동안 살아온 시카고를 떠났다. 사모님이 편물점을 접고 그 다음으로 택한 것이 세탁소였다. 편물점은 완전실패작이었단 소문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분을 뵈었을 때 손이 떨린다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나의 작은 성취를 마치 당신 자신의 일처럼 흥분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분. 한국일보 프런티어 칼럼에 글을 게재할 때마다, 좀 더 넓은 곳으로 우리가 거처를 옮겼을 때도, 방송에서 글을 낭독했을 때도 그랬다. 지치고 메마른 이민 생활 속에서도 아름다운 사랑은 사모님의 포근함 속에서 꽃을 피웠다. 그 후에 들려온 소식은 저무는 가을의 찬바람처럼 나를 쓸쓸하게 했다. 시카고에서 따님이 사는 애틀랜타의 한 요양원으로 가셨다가 뉴욕의 막내아들이 모시고 살았는데 알츠하이머 병세가 심각해져 결국 가까운 사설 요양원에 계시게 됐다는 것까지 추적해냈다.

“어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세요. 음식도 못 넘기고 사람도 기억 못하세요. 청각도 잃고 말도 못하시고 그냥 목숨을 부지하고 계실 뿐이에요. 왼쪽에 풍을 두 번 맞고는 그쪽은 완전히 마비되었고 고개도 오른쪽으로만 돌리고 계셔요.”

행여 충격이라도 받을까봐 미리 근황을 알려 주는 걸 보니 요양원에 가까이 왔나보다. 승국 씨는 나를 현관에 내려 주고 주차장으로 갔다. 손을 씻으러 자리를 떴다가 돌아와 로비의 소파에 앉았는데 그가 휠체어를 밀고 와서 내 앞에서 멎었다. 담요로 몸을 가린 낯선 분이다. 사모님? 어느새 얼굴을 닦고 머리를 빗어드린 흔적이 보였다. 뽀얀 얼굴은 전보다 살쪄 보였고 피부도 맑으셨다. "사모님, 저에요. 김. 학. 인. 생각나세요?" 차안에서 연습한 말들은 한 마디도 안 나왔다. 그래도 나는 보았다. 오른쪽에 고정되어 있는 눈동자에 물기가 지나가는 것을. "반가워. 잘 왔어." 환청이겠지. 나는 사모님을 와락 안았다. "사모님, 고마워요. 사랑해요 사모님." 나는 사모님의 귀에 대고 하나님께 부탁드렸다. "하나님, 하나님을 많이 사랑한 사모님, 너무 힘들게 하지마세요."

무표정한 사모님은 잡은 손을 오래 놓지 않으셨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갑자기 아들이 침묵 속에 끼어들었다. "엄마, 이제 보고 싶은 사람 다 봤네요." 하곤 나를 향했다.

“권사님, 어머니가 하실 수 있는 게 꼭 한 가지 있어요. 잘 보세요.”

그는 내 손을 빼내고 꿇어앉아 자기의 뒷머리를 엄마 손에 닿도록 갖다 댔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분의 다섯 손가락이 조금 펴지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몇 번이나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 채, 열린 눈은 한쪽으로 눈동자를 모은 채. 아들의 반백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머니가 손끝으로 전한 밀어는 거친 세파에 흔들리며 살아가는 그에게 힘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내 가슴에선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넘쳐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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