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야고보서 1:13-18).

하나님을 배우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창조하시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창조의 자리에 있었다 해도 그것을 다 볼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창조주라 믿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면서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다 알거나, 알 수 있다면 그분은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더 정확히 그분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분과 교제하면서도 그분은 신앙의 대상인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그러한 간극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힘과 능력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앉고자 합니다. 그것이 헛된 줄 알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정확한 실체입니다. 따라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그러한 인간의 모습이 반역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때가 찾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고 말씀하셨습니다. 반역을 멈추고 피조물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창조주가 창조주 되시고 피조물이 피조물 되는 나라입니다. 세속의 가치관에 따라 힘과 권력을 추구하던 삶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있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삶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이란 끝없는 갈등과 망설임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대부분 나의 뜻이나 욕망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뜻을 내려놓기가 어렵기 때문에, 신앙은 연단이 필요하고 시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야고보 사도의 권면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1:13-18에서 야고보는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바른 하나님 상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마음 깊은 곳으로 하나님을 알고 믿어야 온전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오해

먼저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특히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두 가지에 대해 언급합니다. 첫째는 '하나님도 악에게 시험 받으신다'는 생각입니다. 이는 하나님도 악에게 시험을 당하는 존재인데, '그분이 과연 누구를 도울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불신앙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한 일로 시험을 당하지도 않으시고 악한 자에게 시험을 당하지도 않으십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악한 생각이나 마귀의 유혹에 이끌려 그릇된 결정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그런 시험을 당하지 않으셨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온 인류를 대표해서 할 일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시험을 받으셨지만 마귀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심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마귀의 시험에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유혹에 빠지지 않으셨고, 말씀에 순종하셨으며 시험에 승리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생생한 본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는 분이셨습니다(히 4:15).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으실 정도로 무력하고 무능력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시험에 들지 않으십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함도 아니요. 귀가 둔해 듣지 못하심도" 결코 아닙니다(사 59:1-2). 그분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분의 능력을 의심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시험에 들 때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그분께 구해야 합니다(약 1:5).

둘째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의심입니다. 능력은 믿지만 그분의 의도를 믿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능력이 있어도 돕지 않으면 사랑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시험 받는 이들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1-13).

하지만 극심한 시련이나 고통을 겪게 되면, “하나님께 시험을 당한다.”면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험의 진짜 원인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비난하고 하나님 탓을 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 우리를 시험하는 분일까요?

시험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동차 사고가 나도, 사업이 잘 안 되도, 자녀들이 말썽을 부려도 그렇게 말하고, 불행이 이어지면 더욱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거니까 잘 참으라고 말합니다. 잘 참으면 더 큰 축복을 주실 거라고 덧붙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야고보 사도의 말대로 하나님은 아무도 친히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실족시키기 위해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또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도록 시험하십니다. 본문에서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말은 악한 유혹으로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시험을 하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다만 그 모든 일들 속에서 연단과 검증의 과정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심으로써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고전 10:13). 자신의 욕심에 미혹되어 당하는 시험이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감당 못할 시험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고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분은 고난의 현장으로 들어오십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분은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십니다(히 2:18).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시험과 고통의 한가운데서 우리보다 더 깊은 탄식으로 탄식하십니다(롬 8:26). 그분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소개하는 하나님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은 다 그분이 주십니다. 그분이 후히 주시는 분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돈이나 권력 등 세상의 것은 받을 때에는 좋아도, 받은 것이 그 사람을 망하게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풍성하면서 그 사람을 복되게 하고, 선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살려주시기까지 합니다. 주님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지만, 마귀가 주는 것은 결국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요 10:10).

뿐만 아니라 주는 방식이나 의도가 전혀 다릅니다. 마귀는 풍성히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다투고 시기하고 경쟁하여 빼앗습니다. 만족이 없으며, 더 큰 갈증에 시달립니다. 그 마지막은 허망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그분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는 분이십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과 놀라운 지혜의 선물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변함없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풍성하게 주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항하여 눈을 떠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풍성하게 주실 뿐만 아니라, 주시는 것이 모두 온전합니다. '온전한 선물'은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온전한 선물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며 완성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선물이요 은혜의 선물입니다.

온전한 선물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온전한 선물들은 평범해 보이지만, 선하고 아름답고 지속적입니다. 욕심에 미혹된 마음의 눈으로는 부족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누릴수록 신비로운 생명이 풍성하게 솟아나는 은혜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해 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모든 온전한 선물들을 후하고 선한 의도로, 사랑을 담아 주시는 하나님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원래 그런 분이십니다. 문제는 세상 방식대로, 즉 자기의 뜻대로, 세상의 방식으로 취하고 얻고자 욕망을 따라가다가 시험에 드는 자들에게는 이런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은혜와 참된 생명의 세계로부터 멀어져 갑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기 뜻을 실현하는 것이 최선의 삶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존재하는 '램프의 요정'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주인이 되어 사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종노릇하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의 결국은 모든 수고가 헛된 것으로 드러나는 허망함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사랑한 대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풍성한 생명을 은혜로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빛들의 아버지'이십니다. 문자적으로는 광명들, 곧 해와 달과 별들의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그분의 창조 능력과 더불어, 그분이 여전히 이 세상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분이 빛이신 만큼 그분에게는 어두움, 곧 거룩하지 못한 것들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해처럼 떴다가 지지 않으십니다. 달처럼 작아졌다가 커지지 않으십니다. 그분 자신이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이지만 그분에게는 아무런 속임도 없습니다. 또한 회전으로 인해 드리우는 그림자도 없으시다는 말은 회전하는 행성이 그림자를 드리우면 그 빛이 가려지는 경우를 말하는데, 하나님께는 그런 식의 제한이나 부족도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그분 자신이 빛이기 때문에 항상 그 빛을 비추십니다. 또한 그분이 주신 것들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변질되거나 해하지도 않습니다. 한결같은 만족을 주며 풍성한 생명의 은혜를 더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며 어리석어 보이는 무모함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모리아 산 사건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이 수용할 수 없는 가장 불합리한 명령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삭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존재 자체를 지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합니다. 그때까지 삶의 실패와 시험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순종의 이유는 단순합니다.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을 따른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계산으로는 맞지 않는 일입니다. 손해 보는 것은 물론이요, 어떤 위험과 고통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 일은 피땀을 흘리는 겟세마네의 기도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처절한 버림받음과 죽음을 통과한 후에 부활의 아침이 밝아옵니다. 영원한 세계가 비로소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얼마나 그분을 신뢰하고 있을까요? 야고보 사도가 설명해 준 것처럼 그분은 '빛들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을 알고 신뢰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기 위해 날마다 우리의 시간을 그분께 드리고 마침내 아브라함처럼 순종하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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