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찾아온 매서운 동장군이 험악한 눈을 부릅뜨고 씩씩거리는 위세에 나무가 쓰러지고, 연약한 나뭇잎이 속절없이 떨어져 뒹굴고, 바나나 나무 널찍한 치맛자락이 볼품없이 구겨진 채 늘어져 있다.

예년 같으면, 10월 어느 날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로 땀 흘려 가꾸어 빨갛게 무르익어가던 고추나무를 비롯하여 각종 채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아 놓고 유유히 떠난 후,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인디언 섬머를 따라 온 따뜻한 날씨가 한 달여를 머물다 가곤 했는데, 금년에는 12월 초순까지 영상의 날씨가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어서 여유로운 계절을 선사해 주었다.

산 높고 골 깊은 이 서북미의 가을은 각종 토산품으로 풍성한 가을을 즐길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붉게 물든 토실토실한 알밤이며 호두, 야생 산딸기, 사과, 배, 상큼 달콤한 산머루, 송이버섯 등등 각종 과일들이 넘쳐난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수고를 아끼지 않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단감이 이 지역의 토산품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 같다.

몇 년 전 캘리포니아에 있는 친구가 말린 감과 대추를 보내왔다. 껍질을 벗겨 말린 곶감이 아니고 얇게 썰어서 말린 감 말랭이다. 더운 지방에서 자라는 대추는 얼마나 크고 실한지 너무 좋다. 이 감 말랭이를 어떻게 먹으면 좋으냐고 했더니 대추와 함께 잘게 썰어 넣고 밥을 하면 맛이 좋다고 알려 준다. 요리하기를 즐기는 내가 즉시 과일 밥을 지어 양념장에 비벼 먹으니 입안에서 요동을 치며 난리가 났다. 또 하나의 밥도둑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우리 집 뜰에는 각종 채소와 과일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거봉포도를 필두로 하여 매실, 사과, 석류, 감, 모과, 무화과 열매가, 무더운 여름 밤 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와 때로는 새벽 2 시가 넘도록 물을 주고 가꾼 데 대한 보답으로 풍성한 기쁨을 선사해 준다.

장시간 보관할 수 없는 과일들을 얇게 썰어서 말려 보기로 했다. 사과를 썰어서 건조기에 넣고 하루가 지나니까 바삭바삭한 스낵이 되었다. 후지사과인데 너무나 맛이 좋다. 지난해에 이어서 좀 넉넉히 추수한 모과를 잘게 저며서 김치 병에 3분지 1을 넣고 꿀로 채워 놓은 후 3개월이 지나면 잘 숙성되어 맛과 향이 풍성하고 목과 감기에 좋은 모과차가 된다.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남은 것은 얇게 썰어서 모과 말랭이를 만들어 놓고 끓인 물에 몇 조각 넣고 우려서 꿀을 넣고 마시면 별미의 모과차가 된다.

몇 해 동안 잘 익은 매실을 수확하기 위하여 기다리다 보면 때를 놓치고 새들이 다 수확을 하기도 했는데 금년에는 무더운 날씨에 풍성한 먹거리가 지천이라서 그랬는지 새떼의 습격이 없이 풍성히 수확했다. 얼마나 달고 맛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과일을 잘 먹지 않는 습관에 그냥 상하는 것이 아까워서 설탕에 버무려 매실 청을 만들었다. 시중에서 판매되는 매실 청은 덜 익은 과일을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씨앗에서 독소가 나와 좋지 않다는 말도 있어서 잘 익은 것으로 씨를 빼고 담갔더니 너무나 맛이 좋다. 좀 더 숙성을 시켜서 나올 완성품을 기대하는 기쁨도 먹는 것 못지 않다.

금년에도 밭에서 각종 채소와 풍성한 무를 추수했다. 청정채소를 기르겠다고 농약을 치지 않고 키워서 수확하고 보니 온통 벌레들의 소굴이 되었다. 내 종아리 만큼씩이나 자란 무가 너무 아깝다. 생각 끝에 무청을 잘라서 가게 한 구석에서 줄을 매고 걸어 말렸다. 비바람 타지 않고 곱게 말려서 파란 색이 그대로인 채 잘 말랐다.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하여 시래기 밥을 지어 초장에 비벼 먹는 동영상을 보았는데 나도 해보아야겠다.

늦가을이면 많은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하얀 속살을 자랑하는 고고한 송이버섯이 모습을 드러낸다. 몇 년 전부터 거래를 해온 버섯 채취하는 분을 통하여 몇 차례 구입을 했다. 비교적 헐한 값에 살 수 있어서 좋다. 볶아 먹기도 하고, 잘게 썰어 끓인 송이 죽은 전복죽보다 맛있다. 송이버섯은 특이하여 양념을 할수록 맛이 없어진다. 얇게 썰어서 말려 놓으니까 맛과 향이 조금 떨어지지만 오래 보관할 수 있어서 좋다. 오랫동안 기침으로 고생할 때 말린 송이버섯 몇 조각을 넣고 끓여 마시면 신기하게 기침이 멎는다.

밭에서 기른 몇 가지 채소를 살짝 데쳐서 말려놓으면 훌륭한 반찬거리가 된다. 그러다보니 우리 집에는 갖가지 말랭이 천국이 되었다. 얼마 전에는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방문하였기에 찹쌀과 멥쌀을 반반으로 섞고 감 말랭이와 대추 말린 것을 잘게 썰어 넣고 밥을 지어 대접하였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음날 만났는데 그 향취를 잊지 못하겠다고 하셨다.

시골에서 자랄 때 가을이면 시래기를 엮어서 처마 밑 담장에 걸어서 말리는 경우가 많았다. 예닐곱 살 무렵 소꿉친구들과 담배 피우는 흉내를 낸다고 시래기를 부셔 넣고 신문지로 말아서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았는데 재채기가 나고 갑자기 세상이 빙빙 돌면서 눈물이 나며 견딜 수가 없었다. 아! 먹는 시래기가 이렇게 독한데 담배는 얼마나 독할까 생각하며 평생 담배를 한 번도 피우지 않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생활에 편리한 많은 전자 제품이 홍수를 이룬다. 각종 신선한 먹거리도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야말로 세계가 1일 생활권으로 변한 것을 실감한다. 그러나 먼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전통적인 음식들이 우리의 입맛을 끌어당기는 것은 어째서일까? 상업화되고 편법이 판치는 세상이 되어서 콩으로 메주를 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진리인데, 이제는 인스턴트 된장에 밀가루를 하도 많이 넣어서 마트에서 사다 먹는 된장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까맣게 변하고 만다. 밀가루로 된장을 쑨다는 새로운 속담이 생길 지경이다.

얼마 전 연로하신 장모님을 모시고 사는 친구 부부가 된장국을 끓여가지고 왔다. 손수 담가 만든 된장국이 입맛을 사로잡았다. 염치불구하고 된장을 조금 나누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된장을 나누어 주면서 내년에는 된장 담글 때 우리 것도 같이 담겠다고 약속했다. 옛날에는 집집마다 고유한 맛을 자랑하는 장독대가 있었다.

이제는 먼 옛날의 일이 되었지만 어릴 적 그 맛을 잊지 못하는 것은 오직 나만의 집착은 아닌 듯하다. 그래서 텃밭에 어릴 적 좋아하던 채소를 가꾸고, 옛날식으로 음식을 만들어 보기 위하여 가능하면 많이 말리고 저장한다.

무를 잘게 썰어서 말리면 무 말랭이, 모과를 썰어 말리면 모과 말랭이 등등 말랭이의 용도는 한이 없다. 옛날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옛 맛을 찾아가는 것은 가능하기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추억 어린 박을 심고 키워서 조롱박을 만들고, 박속을 가지고 조갯살과 새우를 넣고 볶다가 마지막에 낙지를 썰어 넣고 볶아내는 연포탕은 옛 추억과 맛을 동시에 선사해 준다.

사람마다 취향과 맛에 대한 생각은 달라도 어렸을 때 즐겼던 음식은 누구나 그리워한다. 내가 즐기던 음식을 생각하며 찾아나설 수 있는 환경과 축복이 감사하기만 하다.(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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