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야고보서 1:22-25).

정신의 길

오래 전 오지만 찾아다니는 분과 함께 강원도를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여행 때와는 달리 외지고 좁은 길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오지가 가지고 있는 매력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산 전체에 은은하게 퍼져 있는 칡 향기를 알게 된 것도 그때였습니다. 동강에 숨어 있는 작은 마을에 머물면서 문명과 단절된 삶을 느껴보기도 하였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릴 때에는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것들을 보게 하고 무심코 지나쳤던 소중한 것들을 느낄 수 있게 해준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어쩌면 복음 역시 오지 여행처럼 알려지지 않은 길을 찾아가는 여정인지도 모릅니다. 이미 믿는 사람들이 많이 걸어온 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길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에 의해 오염되거나 모험을 두려워하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우회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 정신과 의사인 김진은 『마음의 구리거울』이라는 책에서 인간의 생각에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것을 '정신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방어기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의 고통이 참을 수 있는 한도를 넘으면 의식을 잃게 됩니다.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닥치면 실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고통에 이르지 않기 위해 조건반사가 일어나는 것처럼 정신도 그러한 고통에 이르지 않기 위해 방어기재를 발동시킵니다. 김진 의사가 말하는 정신의 길은 방어기재를 말함과 동시에 이기적인 성향을 반영하고 있는 우리의 생각이 걷게 되는 넓은 길을 의미합니다. 억압, 전치, 투사, 합리화, 동일화가 그러한 길들에 해당합니다.

이 정신의 길들은 우리 정신이 가장 빈번하게 가는 길들이지만 대부분 우리의 삶을 왜곡시킵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가기 때문에 대부분 삶이 왜곡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으면서 정작 본인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 훈련은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묵상은 성찰의 좋은 기회입니다.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자신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말씀이 발아하는 데 선결 조건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성숙의 전제 조건입니다.

스스로 속이는 자

스스로 속이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거나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도 믿음으로 화합하지 않는 자입니다.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하나님께 화합하지 않습니다. 단지 들은 것만으로 자신이 그렇게 된 줄 착각합니다.

15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각 사람이 미혹을 받는 것은 각자의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것이라면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권면한 바 있습니다. 믿는 이들이 자신의 육적인 욕심에 이끌려 시험에 들게 됩니다. 즉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을 유혹하는 세상의 거짓에 속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속고 있습니다. '삼박자 축복'을 선두로 하여 '예수 성공, 불신 실패' 등의 거짓 복음, 왜곡된 복음, 함량 미달의 복음에 속고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뢰하지 않습니다. 물질과 권력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기가 어려워집니다.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싶어집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처럼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거짓 복음, 세상 복음에 속아 넘어갑니다. 결과적으로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생명을 가장한 죽음이 사람을 유혹하여 죄로, 사망으로 끌고 갑니다. 하지만 시험에 드는 사람은 처음에는 그것이 죽음을 낳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죽음이 생명을 모방하여,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임을 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6절에서 속지 말라는 야고보 사도의 권면은 비교적 알아차리기가 수월합니다. 그러나 1장 22절에서 말하는 '스스로 속는 자'란 표현은 실제로 느끼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속는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공감하는 순간 착각이 일어납니다.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적인 변화는 즉각적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그렇게 속는 모습을 거울로 자기의 생긴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고 야고보 사도는 묘사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거울은 청동으로 만든 것이어서 표면이 매끄럽지 않고 분명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거울을 보더라도 쉽게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마음에 새겨져 있습니다. 온유함으로 받기만 하면 발아하고 싹이 트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의 율법은 자유를 주는 율법이기도 하고 자유하게 된 사람들이 따르는 율법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강제하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고, 실제의 삶으로 보여 주셨으며, 우리들에게 친히 명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입니다. 복음으로 자유하게 된 사람들, 곧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함으로써 자유하게 되는 법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 마음에 새겨져 있는 사람은 율법을 잊어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이제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과연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온유함으로 받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행함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복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복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행하는 일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듣기만 해선 그 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머리로만 알면 우리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진리 안에 담겨진 복을 알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찌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이 어찌 세상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스스로 속인 대가는 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고 싶습니까? 천국의 삶을 이 땅에서 살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기꺼이 가난해지십시오. 애통하십시오. 온유하십시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십시오. 먼저 긍휼히 여기십시오. 마음을 깨끗하게 하십시오. 평화를 지으십시오. 정의를 위해 핍박 받는 길을 걸으십시오. 행동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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