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영 사모

 

학교를 마치고 두번째 들어간 직장은 미국에 있는 한 기독교 세계구호위원회에서 한국선교지부를 개설하고 농촌과 아동복지를 위해 후원하고 있는 기독교 사회사업기관이었습니다. 외원기관답게 분야별로 일곱 명의 외국인 수퍼바이저가 있었습니다. 사무실 분위기는 지금까지도 하나님께 감사할 만큼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우리끼리 수퍼바이저들을 부를 때, 한국식으로 스씨, 바씨, 헤씨, 벤씨 등등으로 불렀습니다.
스씨는 사랑하는 약혼자가 교통사고로 죽자 결혼에 대한 생각을 접고 한국에 온 사회사업가였습니다.  한국에서 오래 헌신적으로 일했으므로 한국 문화에도 익숙했고 즐기는 음식도 여럿이었습니다. 가을에는 푹 익은 홍시를 토마토 퓨레처럼 만들어 냉동실에 얼렸다가 한겨울에 간식으로 먹기도 했습니다.  또 휴일에 여행을 할 때면 비디오 카메라로 기록을 남길 만큼 한국에 대한 사랑이 깊었습니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필름 중에는 한국의 김장 담그는 정경을 찍은 것이 있었습니다.  가까이 지내던 한국인 회장의 주선으로 어느 부잣집에서 격식을 갖추어 갖가지 김치를 담그는 풍경을 찍었는데, 배추를 살 때부터 절여서 속 넣고, 마당에 파묻기 까지 잘 편집되어 만든 것 같았습니다.  김치 이야기만 나오면 흐뭇해하며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새로 온 나의 수퍼바이저는 그동안 원조를 받아 운영하던 사회사업을 한국인의 재정으로 담당할 수 있도록 한국내 홍보와 모금을 위해 미국 위스컨신에서 온 하씨였습니다. 김장 때가 되자 직원들이 김장 휴가를 받아 결근들을 했습니다.  내 수퍼바이저 하씨가 언제 스씨의 비디오 테입을 보았는지 신기해하며 우리집 김치 담그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우리 어머니 김치 솜씨는 온 직원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봄 야유회 때 만들어 주셨던 오이소박이는 두고 두고 화제거리였고 겨울철 점심시간에는 인기있는 메뉴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집에 오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거절을 했습니다.  그 대신 김장이 끝나면 그 순서와 방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새로 담근 배추 몇 포기를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외국인 수퍼바이저들 중에는 김치를 아주 즐기는 사람도 있었고, 맵기는 하지만 맛있는 음식이라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습니다. 김장휴가를 끝내고 출근하는 길에 수퍼바이저와 그 옆집에 사는 행정관을 주려고 김치가 담긴 플라스틱 양동이 2개를 들고 갔습니다. 하씨가 자기집 창문에 빨간 수건을 걸어놓겠다고 해서 우리는 라합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뒤 문제가 생겼습니다. 똑똑하면서 다정다감했던 한국인 회장이 어이없다는 듯 내게 말했습니다.  “아니, 김치가 뇌물이래.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하네.” 영어가 되는 직원들은 제각기 흥분해서 한 마디씩 했지만 행정관은 어색한 미소만 지었습니다.  부하직원이 상관에게 주었으면 뇌물이래나?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흔하게 싸주는 것이 우리네 김치 인심이라고 누누이 말했지만, 행정관은 끝내 내가 가져다준 김치를 그 해의 크리스마스 파티 음식으로 내놓았습니다.
직원들 모두가 가족 같았으므로 부하직원이나, 상관이라는 말은 물론이고 뇌물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것이 정말 황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내 수퍼바이저도 당황해서 미안하다고 수없이 말했습니다. 매사에 모든 의견들을 자유롭게 나누고 또 적절히  수렴하고 포용하는 분위기였음에도 의외의 반응이 나온 것에 나는 정말 무안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명분을 만들었습니다. 그의 부인이 만든 잼과 피클 등의 저장식품과 김치를 문화교류라는 이름으로 나누기로 한 것입니다.  나는 한 바구니의 미국 음식문화를 받아들고 나오면서 이 무슨 위선인가 싶었습니다.
치사하게 그 일로 직장을 그만둘 마음은 없었지만 너무 부끄러워서 거의 두 달을 혼자 꽁꽁 앓았습니다.  마음이 가라앉자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핑계를 대고 사표를 냈습니다.  졸업반지 아닌 퇴사기념반지를 끼고 나온 지 보름만에 나는 또 다시 불려 들어갔고 결혼한 후에도 그곳에서 일을 계속했습니다.  내가 너무 부끄러워하자 일단 내가 원하는대로 퇴직을 허락했다가 다시 불러준 그 직장과 따뜻한 마음의 한국인 회장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때 뇌물의 확실한 뜻을 깨우쳤고,  아무리 잘 믿는 사람들일지라도 그 정도로 예민하게 바로 살려고 노력한다면 뇌물이라는 단어가 어디에도 발 붙일 수 없는 세상이 될 수 있겠다는 긍정적인 답도 얻었습니다.  비록 씁쓸한 오해의 미소들을 잠시 나누어야 했지만...
김치 페스티발이 동네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들으며, 불현듯 그 때 그 일이 생각나 웃으면서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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