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9-20).

'노'를 외치며 살아가는 사람들

우리의 인생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불합리한 인생을 이해하고 공평하지 않은 세상을 공평하게 느끼고 싶어 안간힘을 씁니다. 특히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러한 욕구가 강합니다.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고 싶고, 배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공평의 충격이 너무 커서 감당이 안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심한 경우 신앙 자체를 포기합니다.

세상에는 냉소주의적인 분위기가 팽배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대한 열정을 잃고 있습니다. 그들은 삶에 대해 냉소적이고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부정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버틀란드 러셀은 인생을 "불쾌한 뒷맛을 남기는 매우 형편없는 포도주"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유명한 배우는 임종의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커튼을 내려라. 어리석은 광대 놀음은 끝났다. 인생에서 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그저 광대극일 뿐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타인은 곧 지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유명한 대학의 한 화학교수는 "인간은 화학적 연소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스'

사도 바울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 '노'를 외치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위대한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노'를 외치는 세상이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예스'가 도래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해 외치던 수많은 부정적 '노'에 반대하여 '하나님의 예스'가 선포되었다고 선언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참되고 진리라는 것을 긍정하는 '하나님의 예스'입니다. 인간적인 선언이 아니라 신적인 긍정,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예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진리라고 긍정하는 표징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모펫은 오늘의 성경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스'가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긍정하는 '예스'가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펫은 예수 그리스도가 단순한 예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이전의 인간의 삶이란 그저 하나의 '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이전의 고대인들은 자신들의 삶이 제기하는 심원하고 엄숙한 질문들에 "예스"라고 말하는 법을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예스'입니다. 예수님은 부당하게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약속이 진리라는 것을 긍정하는 예스입니다. 모든 이들이 새롭게 자기의 인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방식을 살도록 해주는 해방의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삶으로 증명된 진리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는 모두 검증 받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들은 실제 그분의 삶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실제 삶에 적용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삶은 옳다고 검증된 삶이요, 자신들이 올바른 삶을 살고 있는지 검증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인도하는 인도자이시며, 그 길은 예수님 자신이 걸으셨던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인생 여정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마주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러한 검증된 지식에서 나온 대답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깊음에 말하는 깊음이요, 마음에 대답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검증된 것들은 결코 하찮은 것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삶의 정황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분의 탄생은 가장 비참한 탄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가난한 탄생은 세상의 가장 가난한 이들을 품어 안고 온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비전을 인류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분이 공생애를 시작한 뒤의 모든 상황들 역시 쉬운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들이 예수님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여는 문이 되었습니다.

외딴 광야에 오천 명의 성인 남자들이 굶주리게 된 상황도 그분에게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적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 예식도 인류에게 새롭게 열린 세상이 영원한 축제의 삶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기적이었고, 간음한 여인과 군중들 역시 그분을 통해 모든 이들이 구원을 미리 경험하는 용서의 자리가 되었고, 부정한 사람들, 죄인들, 창녀들과의 식사는 인류의 형제애로 향하는 간선도로가 되었습니다. 어려움과 곤란한 지경들이 끊임없이 다가왔지만 그분은 그것들을 부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예스'로 살아내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분의 십자가는 어떤 고난과 역경도 인생의 '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예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예스는 매우 실제적인 예스입니다. 그것은 최악의 것들을 받아들여 최선의 것들로 바꾸어 놓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스'가 된 사람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스'로 살아가신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스탠리 존스(1884~1907)는 하나님의 ‘예스’가 된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그는 인도의 선교사였으며, 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선교사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1971년 12월 4일 새벽은 인생 대반전의 시간이었습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져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는 평생 전했던 말씀을 곤경에 처한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졌음을 깨닫습니다. 두 눈의 초점이 달라져 글을 읽을 수 없고, 오른손이 마비되어 글을 쓸 수도 없고 혼자서 걸을 수도 없게 된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분명하지 못한 발음으로 말한 것을 녹음하여 딸에게 주었고, 딸은 글로 써서 다시 아버지에게 읽어드렸습니다. 그렇게 녹음과 기록과 수정을 반복해 『하나님의 예스』 라는 책이 탄생했습니다. 그 책에 수록된 일기 두 편을 소개합니다.

1972년 6월 인도의 삿 할에서 -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승리이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네 일을 수행하기에 충분한 시력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여전히 기뻐하면서 내게 주어진 길을 가겠지만 말이다. 지금 나는 그 약속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분명히 느끼고 있다.

미국 최고의 의사들은 "당신은 이제 걸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고, 인도 최고의 안과 전문의들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도하는 것 이외에 자기들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과학은 나를 위해 휠체어와 기도를 권하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점에서 나는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이다. 모든 정황들이 이적이 일어나리라는 것, 혹은 내가 윌리엄 부스의 선례를 그대로 따를 수 있으리라는 것을 명확히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내가 '하나님의 예스'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예스'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모든 것들이 준비되어 있다.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결과만을 기다린다. 만일 내가 기적적으로 시력을 되찾는 것과 시력을 잃은 채로 여전히 기뻐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 두 가지 경우 가운데 하나를 버리고 하나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자유롭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둘 다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자유로운 사람일 것이다.

1972년 6월 인도의 삿 할에서 - 더 친밀해진 동행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참이고 진리라는 것을 증언하시는 '하나님의 예스'이신 예수님! 인생이 우리에게 인간의 '노'(No)를 말할 때에 '하나님의 예스'를 말씀하시는 예수님! 감사드립니다. 제 평생을 주님과 동행했지만,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오늘까지 지난 몇 개월은 특별히 더 그랬습니다. 지난 몇 개월은 교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원칙과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이 원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인격과 교제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스이신 예수님이 인격이시고, 저 또한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제 환경에서 일어난 모든 것들의 '예스'의 쪽에 서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먼저 주님께서는 제가 지금까지 해왔던 그대로 제 사역을 능히 감당할 만큼의 충분한 시력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둘째로 제 운동 능력과 관련해서 주님께서는 충분한 힘을 주시어 제가 전적으로 무력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되게끔 해주셨습니다. 셋째로 주님께서는 뇌졸중 발작 이후 까마귀 우는 것처럼 쉰 소리를 내던 제게 본래의 목소리를 회복시켜주고 계십니다. 넷째로 주님께서는 기도 시간에 말씀해 주셨던 그대로 제 왼손이 보조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끔 회복시켜 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그대로 저는 신체적인 한계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한계라도 제가 한 인간으로서 세상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을 조금도 제한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 한계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향한 문을 활짝 열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주님과 제가 서로 협력하여 신체적 한계의 문제를 풀어 가리라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은혜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많은 세월을 주님과 함께 지냈습니다. 그 시간들은 결코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들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늘 내적으로 흥분되어 있었고, 언제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길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저는 뇌졸중 발작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적응 기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우울해하거나 낙심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뇌졸중 발작이 가져다 준 신체적 한계를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 한계들이 바로, 제가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하나님 나라가 저를 소유할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저는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다양한 상황들이 주어집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의 예스’로 살아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로 주어진 삶을 하나님 나라의 삶으로 승화시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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