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야고보서 2:1-7).

의식이 깨어 있는 성도

참으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것일까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그 믿음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아는 이는 드뭅니다. 믿는다고 확신하면서도 막상 그 믿음에 관한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실체가 없는 믿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의 이성을 스스로 제한한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해 자신이 없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부딪혔을 때 판단을 내리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신학을 공부한 목회자라는 생각을 합니다. 문제는 그 목회자가 잘못할 경우에 그 일에 대해 판단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듣고 배운 말씀, 마음에 심긴 그 말씀을 삶으로 표현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또 계속해서 배우십시오. 그리고 다시 살아보십시오. 물론 기도해야 합니다. 진리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권면을 듣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의 의식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정죄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리의 삶 속으로 투신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심긴 말씀을 듣고 온유하게 받아 말씀대로 행하여 열매를 맺는 것이 참된 믿음이요, 참된 경건함입니다.

차별 없는 사회

하나님 나라는 무엇보다 차별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모두가 형제요 자매입니다. 참된 믿음과 사람을 차별하는 태도는 함께 갈 수 없습니다. 특히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차별하는 일은 반드시 사라져야 할 세상의 관습입니다. 만일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사회적인 지위나 성공 여부로 차별한다면 그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현상들이 일어난다면,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특징을 보여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난한 성도는 무시를 당하고 부와 영향력을 가진 교인은 높임을 받는 것이 현실입니다. 큰 교회 성도들은 자기 교회를 자랑하고, 작은 교회 성도들은 자기 교회를 밝히지 못하고 쭈뼛거리는 모습, 가난한 교회의 가난한 목사는 기가 죽고, 부유한 교회의 부자 목사는 기가 살아 있는 모습도 이러한 현상을 보여 줍니다. 차별이 존재하는 교회는 과거에도 존재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런 현상이 옳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무 아팠던 기억

야고보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기 전에 그분을 "영광의 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광의'(테스 독세스)라는 표현은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실 뿐만 아니라, 장차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이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그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사람을 차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표현에는 야고보 사도만의 특별한 체험이 녹아 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요, 후에 초대교회의 기둥이 된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께서 살아계셨을 때에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야고보는 그의 형제인 예수님을 외모만 보고 판단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믿음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 전까지 예수님의 정체와 신분을 알아보지 못했고, 그분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 사도가 가장 먼저 주님에게 "영광의 주"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특별하게 부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야고보 사도의 속마음이 투사되어 있습니다. 그런 주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형제와 자매들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구분 지을 수 없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 구체적인 상황을 2절과 3절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과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옵니다. 세상에서는 VIP 고객과 신용불량자가 같이 들어온다면 은행원들이나 백화점 직원들은 다르게 반응할 것입니다. 그러나 회당 안에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유일한 한 가지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교인들은 사람들을 차별했습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고 금가락지를 낀 부유한 사람들에게는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서 있든지 의자도 없이 바닥에 앉으라고 했습니다. 부자들은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문자대로 하면 '빛나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광의 주님은 그들처럼 빛나는 옷을 입으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영광의 주시라는 것을 그분의 단순하고 초라했던 외모로는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피와 먼지로 범벅이 된 그분의 더러운 옷마저 다 벗겨지고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야 부활의 주님으로서 영광의 본체가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은 마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과 같은 실수를 범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뼈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흩어진 교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야고보 사도는 마음이 너무 아팠을 것입니다. 단순한 인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본질에 속한 문제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거꾸로 된 가치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거기서 이성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다시 동화되고 맙니다. 그래서 '영광의 주'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들도 세상의 방식에 따라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고 무시했습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믿음 이외의 다른 기준이 들어왔고, 그 다른 기준이 그들을 장악하게 되었고 악하게 판단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잘못은 개인적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반드시 공동체적 실패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당시 로마 사회와 문화 속에 독버섯처럼 퍼져 있던 온갖 차별들, 즉 자유인과 노예들,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들 사이에 존재했던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은 차별들이 교회 안에서도 분별없이 반복되어 행해졌습니다. 세상 속에 흩어진 교회가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과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나라의 모습을 보이는 데 실패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의식이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이 세상의 부패한 질서와 원리를 뒤집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상에서 차별받는 자들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의 주권과 통치의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세상이 판단하고 버리고 외면하고 짓밟은 그들을, 오직 그분의 주권과 은혜로 의롭다 하시고 넘치는 복을 주시고 장차 오는 나라를 유업으로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 자체가 이 세상 원리로는 설명될 수 없는 하나님 통치의 살아 있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인 공동체, 곧 참된 교회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 세상의 원리로 살지 않는,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선전하는 사람들

그렇게 하지 못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더렵혀집니다. 흩어진 교회의 일부 신자들 안에 있는 차별적인 태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합니다. 부자 신자들이 가난한 신자들을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가고, '그 아름다운 이름'을 멸시합니다. 그보다 더한 악행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은 유대적인 표현입니다. 언약궤나 성전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되는 것처럼(렘 15:16), 그분의 백성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림으로써 그분에게 속한 자로 여겨집니다.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 그분의 소유가 되고 그분의 이름을 짊어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깨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이름이 얹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 한 마디,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는 그분의 이름과 직결됩니다. 그것은 다만 사람들에게 보이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 깊은 곳에 있는 동기까지 해당됩니다. 죽음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나 죽으나 우리가 그의 것이로라"(롬 14:8)라고 말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옥죄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힘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활력소이며 인생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흩어진 교회의 성도들은 주로 가난한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극심한 빈부격차가 있었던 당시의 사회 속에서 흩어진 교회가 처했던 경제적, 사회적 위치는 지주들에게 저항했던 열심당원들의 위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열심당원들의 방식과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가난했지만 가난하지 않은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인과 노예가 형제자매가 되어 빈부의 차별이 없는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샬롬의 나라를 세상에 보여 주었습니다.

믿음은 개인적이지만 개인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공동체를 이루어 혁신을 이루어 냅니다. 부패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샬롬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의 모든 것을 무효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만방에 전하는 '아름다운 발'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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