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야고보서 2:8-13).

거짓의 사람들

미국의 정신과 의사 스캇 펙은 자신의 저서 『거짓의 사람들』에서 악을 질병이라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악이 병이라는 사실을 확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악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을 세상에 투사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만성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입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악한 사람들이 그렇게 파괴적인 이유는 그들이 악을 퇴치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악의 소재지를 잘못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 속에 있는 타고난 고질병인 악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일종의 치료이면서 자기를 개조하는 일입니다. 낡은 성격 유형은 죽고 새 성격 유형이 그 자리에 들어서야 합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들은 병적일 만큼 현 상태의 성격 유형에 집착합니다. 일종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완전하다는 생각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는 곧 파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하시기도 하지만 '자아의 죽음'이라는 정확한 치료법을 사용하십니다. 그것만이 고질병인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율법과 자유의 율법

외모로 판단하고, 세상적인 부와 가난으로 차별하는 태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가장 중요한 내용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떠난 것이 성경이 말하는 악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악입니다.

그러한 악을 지적하며 야고보 사도는 먼저 율법을 언급합니다. 먼저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흩어진 교회의 상황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합니다.

우리들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처음부터 다른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생겨난 교회는 유대교와 완전히 다른 새로운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상황은 우리의 생각과 많이 다릅니다. 성경을 보면 회당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사도 바울의 교회 개척은 항상 회당 중심입니다. 그 회당은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회당은 일종의 유대교 교회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회당에 모였습니다. 처음의 기독교 신자들은 예수를 따르는 유대교인이라 말해도 좋을 정도로 유대교의 새로운 분파처럼 여겨졌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결별은 서기 70년 이후의 일입니다. 예루살렘성이 함락되고 성전이 완전히 무너진 후 성전을 중심 삼았던 유대교에는 일종의 위기의식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대대적인 유대교 개혁이 이루어집니다. 유대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유대교 안에서 활동하던 그리스도인들을 축출합니다.

그 이전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 회당 안에서 활동하면서 자신들의 기독교가 어떻게 유대교보다 나은가를 입증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서 2:8-13에서도 그러한 그들의 노력이 잘 드러납니다.

8~11절에서 야고보 사도는 율법을 먼저 언급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을 받아들여 그 기준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특히 야고보 사도가 인용한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대의를 요약하신 내용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유대교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율법과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을 함께 말함으로써, 당시 유대교 신자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내용을 먼저 언급합니다. 그런 다음 곧바로 자유의 율법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여기서 "너희는"이라는 말은 유대교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야고보 사도는 차별하는 태도가 유대교 율법에 어긋난다는 것을 먼저 말한 다음, 율법의 완성판인 '자유의 율법', 곧 그리스도의 법은 더할 나위 없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

그 차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율법에서도, 자유의 율법에서도 이웃 사랑은 핵심입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의 법, 긍휼을 행하라는 율법의 요구를 구약에서 지켜왔던 식으로 지키려 한다면, 옛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리고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처럼 형식적이고 위선적이며, 자기 의를 드러내는 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구약 율법의 요약이요 핵심이랄 수 있는 이웃 사랑이 요구하는 모든 의를,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온전히 성취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성취하신 삶과 죽음의 기준으로 이웃 사랑의 법을 새롭게 명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않았다면 불가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덧입은 죄인이라면, 가능한 일입니다. 이미 자신의 심령 안에 '심긴 말씀', 새 언약의 말씀, 긍휼의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아 행할 뿐입니다.

예주님께서 이미 순종하셔서 승리하신 것처럼, 그 긍휼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자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은 자유의 법, 곧 긍휼의 법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요구는 너무도 분명합니다.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은 두렵기만 한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놀라운 말씀입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 심긴 그 말씀' 때문입니다. 마음에 심긴 이유는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심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시는 피로 거룩해졌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 긍휼의 복음이 심겨져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듣지 못하는 것은 온유함으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죄의 법'이 듣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심긴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듣기만 하면, 마치 새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것처럼 우리 역시 복음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자유의 법입니다. 그 긍휼의 법 때문에 자유하게 되었고, 심령에 새겨진 긍휼의 복음을 따라 긍휼을 행함으로써 더욱 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랑

야고보 사도는 그 긍휼을 자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세상적인 부와 재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되고 허망한 자랑입니다. 허망한 자랑을 일삼는 그리스도인들의 언행은 최후의 심판대에서 용서받기 어려운 죄가 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여전히 모든 것을 이기고 자랑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긍휼의 폭포수 아래 서 있는 자들은, 긍휼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분 혼자만의 작업이 아닙니다. 우리의 적극적인 동참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바로 거기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는 늘 우리 마음 안에서 긍휼을 확인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우리의 마음에 긍휼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다른 이의 아픔을 보면 내 마음이 아파야 합니다. 다른 이의 어려움을 보면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속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긍휼로 서로를 긍휼하게 대하기를 바랍니다. 가정의 울타리를 넘고,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부터 소외를 받고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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