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Spirituality 68

 “십계명 묵상” 여덟 번째로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우리는 삶에서 무언가를 도둑질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남의 물건을 훔치고 빼앗기도 하고, 비지니스에서 많은 이익을 남기기 위해 부적절한 일을 하기도 합니다. 요즘은 지적 소유권에 대한 도둑질도 큰 문제입니다. 불법으로 영화나 음악을 다운로드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학교에서는 지적인 도둑질을 “표절”이라고 부르는데, 표절 때문에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지적인 도둑질은 설교자들에게도 큰 문제가 됩니다. 한 주일에 워낙 많은 설교를 해야 하다보니 설교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표절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혹은 남의 설교를 그대로 가져오지는 않더라도 설교 준비가 잘 되지 않는 공백을 남의 설교에 있는 예화로 가득 채우기도 합니다. 여덟 번째 십계명은 직면하기 싫은 우리들의 모습을 잘 드러냅니다.

자유하라

우리는 왜 도둑질을 하는 것입니까? 어거스틴의 『고백록』에는 유명한 일화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어거스틴이 소년 시절에 했던 배 도둑질의 이야기입니다. 악의적인 도둑질이 아니라, 그저 어린애들이 몰려다니면서 남의 집의 배를 서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이야기가 『고백록』에서 유명한 일화가 된 것은, 어거스틴이 소년 시절의 이 철없는 행동을 소개하면서 도둑질의 중심에 담겨 있는 의미를 묵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배 도둑질의 본질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죄 자체를 즐기는 모습입니다. 어거스틴은 소년 시절에 배를 도둑질한 것이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랬다면 배를 서리해서 맛있게 먹었을 텐데, 그것을 훔치자마자 버린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결론은 그저 훔치는 행위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곧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의 본성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죄의 본성은 무언가를 집착하게 하고, 욕심을 가지게 하고, 그래서 남의 것을 빼앗도록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어거스틴은 배 도둑질의 이유로 두 번째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하는 만족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배 도둑질에서 허황된 기쁨을 찾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만 참다운 만족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는 법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곁을 떠나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하는 만족과 기쁨을 찾지 못하면, 다른 것에서 그 기쁨을 찾으려고 합니다. 재물에서, 명예에서, 혹은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소년 시절 배 서리를 하면서 아이들과 몰려다니던 그 허황된 교제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있을 때에만 발견하는 만족을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탐하고, 그것을 취하면 기쁨과 만족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둑질의 어두운 그늘이 우리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비록 내가 집착했던 물질과 명예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죄의 본성인 욕심과 욕망에 사로잡힌 나의 모습을 발견할 뿐이고, 그 어두운 그늘 아래서 인생의 기쁨과 만족을 찾을 길이 없다는 당혹감만 남습니다. 따라서 십계명의 여덟 번째 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은 자유를 향한 선언입니다. 욕망과 욕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 죄의 본성에 매인 삶으로부터 자유하라는 초대입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서 인생의 의미와 기쁨을 찾으려는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하라는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려놓음의 자유

자유를 향한 이 초대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요? 두 가지 방법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단순하게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과 욕심을 멈출 때, 우리에게 자유가 찾아옵니다. 역대하 7:14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회복의 역사를 이루는 방법은 악한 길에서 떠나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욕심과 욕망을 멈추는 것입니다.

김겸섭 목사님이 지은 『천사는 오후 3시에 커피를 마신다』라는 책에는 북미 인디언들이 전해 주는 두 마리의 늑대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대화를 하는 중에 할아버지가 이렇게 묻습니다. “얘야, 사람 마음 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산단다. 한 마리는 착한 늑대인데, 너에게 감사하고 용서하라고 속삭인단다. 다른 하나는 나쁜 늑대인데, 너에게 분노와 탐욕을 가르친단다. 그런데 이 두 늑대는 네 마음속에서 항상 다투고 있단다. 이 두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겠니?” 손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잘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이렇게 알려 줍니다. “그거야,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기는 거란다.”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욕심과 욕망의 늑대에게 계속 먹이를 주면서 스스로 죄의 본성에 사로잡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의 늑대, 분노의 늑대, 욕심의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멈출 때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가 찾아옵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여덟 번째 계명,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내려놓아라. 그러면 자유가 찾아올 것이다.” 이것은 내려놓음의 자유입니다. 욕심과 욕망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풍성히 경험합니다.

은혜의 힘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내려놓음의 자유를 경험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의 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자유를 경험하도록 은혜를 베푸십니다. 고린도후서 3:17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는 욕심과 욕망을 멈출 능력이 없지만, 주의 영이 함께하실 때 이것이 가능합니다.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힐 때,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경험하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어거스틴은 『고백록』에서 자유를 향한 삶을 얻으려고 씨름합니다. 그런데 그는 이 자유를 스스로의 힘으로 얻지 못합니다. 그는 회심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내면 안에서 일어나는 욕망의 문제로 씨름합니다. 어거스틴은 욕망과 욕심을 내려놓으면 자유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자신 안의 욕망과 욕심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내려놓을 길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어거스틴에게 신비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왜 너는 네 발로만 서려고 하느냐? 그래서 너는 설 수 없는 것이다. 주님께 네 자신을 맡겨라. 두려워 말라. 그가 너를 붙들어 넘어지지 않게 하시리라. 두려워 말고 너를 그에게 용감히 맡겨라. 주가 너를 영접하여 온전케 하시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 나는 할 수 없지만 은혜의 힘으로 가능하게 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경험하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도둑질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말씀은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은혜의 힘을 의지하라. 그러면 자유를 누릴 것이다.” 욕심을 내려놓고 은혜의 힘을 의지할 때 경험하는 자유를 풍성히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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