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령으로!

집단과 집단주의의 횡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있다. 세상과 기업들은 집단주의에서 해방되기 위해 최고의 강사를 모셔 ‘다양성 관리’를 배우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선물로 보내주시는 ‘성령’에 대해서 배운다. 오직 성령에 의존해서만 집단주의의 무덤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를 통해, 가장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신다. 자끄 기예가 말했듯이, “오직 성령을 체험하고 그런 성령에 대한 확고한 믿음만이 인간들의 영향력에 좌우되지 않는 확실성과 빛을 제공해 주고 결국 열매를 맺게 한다.” 집단주의 파워가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더욱 지독한 성령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집단주의의 선봉자들이 온갖 물리적인 방법으로 그 위세를 과시할 때, 성령주의자들은 사도행전 2장의 교인들처럼 한데 모여 무릎 끓고 통성으로 기도함으로 성령의 은사를 받는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여기서 끝나면 온전하지 못한 성령주의자가 된다!) 거룩하고 선하고 정의로우며 사랑에 근거한 분별력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낸다(행 2:41-47). 이게 공동체 안에서의 참된 성령의 열매이다.

분별의 삶은 성령에 얼마나 의존하느냐에 달려 있다. 언제까지 집단주의의 희생자요 방관자로만 남아 있을 건가? 성령을 구하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살라! 다른 사람/권력/돈/명예의 눈치를 보지 마라! 하나님은 결국 당신 한 사람을 보신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나? 집단주의에 항거하는 고작 10명의 의인이 없어서였다. 21세기의 한국 혹은 북미에 사는 우리가 이 10명에 들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 앞에서’ yes는 yes라고, no는 no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의 가장 악독한 왕 중의 한 명인 아합에게 아부하던 바알 선지자 450명 앞에서 멋지게 싸워 이긴 디셉 사람 엘리야. 아합 왕이 드디어 전쟁을 하기 위해 불러모은 400명의 집단주의 애호가이자 거짓 선지자 집단 앞에서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대하 18:13)고 당당히 선포하고는 스스로 고난에 처한 미가야. 부정한 다윗 앞에 선 서슬 퍼런 나단 선지자. 자신의 스승과도 같은 궁궐의 환관장 앞에서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겠다고 채식주의를 고집한 다니엘(단  1:8). 그뿐인가?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금으로 신상을 만든 느부갓네살 왕이 “누구든지 자신에게 절을 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겠다”(단 3:6)라고 공포했을 때, 이들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다”(단 3:16)고 딱 잘라 말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라고 당당히 최후통첩을 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실지라도(이 믿음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우리는 당신네들에게 아첨하며 절하지 않겠소!

사도행전 17장에서 소개되는 이방의 중심 아테네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현대의 신학자들조차 사도행전의 백미라고 일컫는 사도 바울의 아레오바고 연설이, 그것도 이방의 문화 한 가운데서 행해진 것이다.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해 공식적인 사도로 인정받은 바울은 “도시에 우상이 가득한 것에 분개해”(행 17:16)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변론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최고의 철학자들과 적진의 한가운데인 광장에서 한 판 붙게 된 것이다. 바울은 기죽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여들수록 그의 목소리는 커졌고 그의 눈은 빛났다. “너희들의 이방의 신들은 불과 금속에 새겨진 장식에 불과하나 우리의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5)고 당당히 선포했다. 그러면서 “회개하라”(행 17:30)고 명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모든 자들에게 혼동이 왔다. 자신들의 신들과 바울의 신의 진정한 차이에 대해 눈 뜨기 시작했다. 급기야 바울을 따르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 중에는 관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도 바울을 제지하지 못했다. 그가 하는 대로 놔둬야만 했고, 그의 말을 들어야만 했고, 그가 말을 마치고 떠나가도록 해야 했다. 누구도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없었다. 군인들에게 신고할 수도 없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거짓선지자들, 집단의 우상들, 부정과 거짓 율법들과 맞서 싸우는 이들의 용기와 분별력 있는 행동은 어디서 온 것인가? 가장 훌륭한 분별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았을 때에만, 인간으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용기와 기백과 권위가 철철 넘쳐나고, 집단주의의 세력들이 눈치를 보고 설설 기게 되는 것이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한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다(행 5:29). 그래서 자기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이다(행 20:24). 요한복음 18장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동산에 들어가시는 것으로 시작된다. 최후의 만찬은 끝났다.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두 제자의 배반이 곧 이어질 것이었다. 횃불과 무기를 든 관원들이 밀어닥쳤다. 예수님은 당황하지 않으셨다. 침착하게 누구를 찾아왔느냐고 물으셨다. 아무런 저항 없이 “내가 너희들이 찾는 바로 그 자다”라고 말씀하셨다. 곧 있을 베드로의 비겁한 세 번의 부인과 대조되는 주님의 말씀이다. 그리고는 잡혀가서 빌라도와 대제사장들 앞에서 심문을 당하셨다. 이제 주님의 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베드로는 밖에 나가 혼자서 울고 있을 뿐이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들로부터 거절당하셨다. 요한 저자는 이어지는 심문 과정에서 주님을 범죄자로 몰아가지 않고, 하나님 말씀의 계시자요, 모든 시나리오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빌라도와 다른 인간들은 예수님의 아이덴티티와 그분이 앞으로 성취하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조연의 역할로 족하게 만들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혼자이셨으나, 적진의 한가운데에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주님답게, 추호도 흔들림 없이, 담담히 예정된 고난을 받아들이셨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뤄지도록 허락하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숨이 끊어진 바로 그 순간 모든 인간들의 집단적인 악과 횡포는 더욱더 기승을 부려야 했건만 도리어 그 효력을 잃었다. ‘너희는 예수님같이 되지 말라’고, ‘그는 너희의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공포하는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은 그 악의 집단들이 추호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죽음을 본 모든 자들이 그 범죄자의 피로 말미암아 도리어 죄 사함을 받고, 악에서 구원되고, 그와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거하게 된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이 이 세상 집단 악에 대한 하나님의 가장 성스러운 복수극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세상의 부정한 온갖 집단주의는 예수님의 피와 함께 2천 년 전에 끝장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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