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야고보서 3:3-5).

정명(正名)

역사는 진리의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 줍니다. 공자 또한 그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공자는 노나라의 정치가로서 자신의 사상을 실천에 옮길 기회를 얻었는데, 정치를 너무 잘해서 노나라의 힘이 강해진 것을 주변 나라들이 질시하는 바람에 결국 자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공자의 사상 가운데 정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논어에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공자에게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한 위나라의 임금이 스승님을 찾아와 함께 정치를 해보자고 제안한다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공자는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는 것', 즉 정명을 먼저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정명이란 다시 말해 사물을 제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입니다. 공자는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국가가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정치뿐 아니라, 오늘날의 기독교는 얼마나 진리로부터 멀어져 있는지요? 그래서 "예수 없는 예수 교회" 혹은 "바벨론에 갇힌 복음"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말의 의미가 달라짐으로 해서 복음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복음에 사용된 말들의 의미가 인간의 욕망과 탐심을 합리화하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랜디 알콘의 소설 『천국의 사람 리쿠안』에 그러한 사례가 등장합니다.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다룬 이 소설에 등장하는 외국인 기업가 벤 필딩은 만리장성을 바라보며 진시황제의 놀라운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중국인 친구 리쿠안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에게 만리장성은 강제 노역 때문에 죽어간, 수천, 수만 명에 달하는 중국 농민들의 묘비일 뿐이었습니다. 리쿠안은 만리장성의 위대함을 판단하는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돌과 회반죽 때문에 남편과 아들들을 잃어버린 여성 농민이 그 기준이지. 이런 속담이 있어. '사물을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다.' 나에게 저것은 '만리장성'이 아니야. '고통장성'이야."

과연 어느 단어가 바른 것일까요?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만리장성이라 부르느냐 아니면 고통장성이라고 부르냐에 따라 현실과 미래가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계속해서 만리장성을 지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장성이라 부르는 사람은 그와 같은 희생의 역사를 시작하거나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라

이름을 바로 잡는 그 일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도 강조되고 있는 바입니다. 성경은 많은 구절에서 진실을 요구합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은 사랑으로 진리만을 말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진리의 변증법은 이름을 바로잡는 최선의 길입니다. 사랑에 근거를 두지 않는 진리는 폭력적이 될 수 있고, 행동하지 않는 사랑은 연약한 감상주의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는 훈련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늘 염두에 두고서 언제나 사태를 최대한 명확하게 표현하는 단어들을 선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랑과 진실함은 여호와 하나님의 특성입니다. 이름을 바로잡으려 할 때 과연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니면 세상의 온갖 우상들의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겸손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의 선택과 행동, 태도와 목표에 붙인 이름들은 변함없이 정직하고, 자비롭고, 사랑과 진실이 담겨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시 51:6). 사도 바울 역시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편 기자와 같은 진실함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가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해서만 일합니다“(고후 13:6). 또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제는 진리를 말하므로 여러분과 원수가 되었습니까?"(갈 4:16)

절대적인 말의 영향력

야고보 사도는 말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지를 역설하고 있습니다. 말馬, 배船, 불火의 세 가지 예를 들어, 혀를 사용해서 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를 역설합니다.

먼저 혀는 말의 입에 물린 재갈과 같다고 말합니다. 비록 작지만 그것 하나로 말을 원하는 곳으로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말에게 재갈을 물리지 않는다면 말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재갈을 물리면 말을 탄 사람이 이끄는 대로 말은 서고 달리고 방향을 전환합니다. 말은 내뱉으면 그뿐인 것이 아닙니다. 말을 한 사람은 사람이지만 일단 말을 하고나면 그 말이 그 사람의 재갈이 되어 말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이어서 야고보 사도는 말을 배에 달린 키에 비유합니다. 키처럼 혀는 나아가는 방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길을 사십 년 간 걸어야 했습니다. 그 광야는 그토록 광활한 광야가 아니었습니다. 짧게는 한 달, 길어도 일 년이면 충분히 지나갈 수 있는 넓이였습니다. 그들이 광야에 사십 년이나 머물러야 했던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한 말 때문이었습니다. 바란 광야에 도착한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의 대표를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열두 명의 대표들은 똑같은 것을 보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보고는 둘로 극명하게 갈라졌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대표들은 그곳이 좋은 땅이지만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거인들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마치 메뚜기와 같다고 말하며 그곳을 정복하는 것이 자실 행위와 다름없다고 보고했습니다. 반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곳은 좋은 땅이고 그곳의 거민들이 크고 장대하지만 그들을 자신들의 밥이라고 말하며 나아가 정복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이스라엘은 열 명의 대표들의 보고를 따랐고 결국 그들은 사십 년을 광야에서 방황한 후 광야에 뼈를 묻고 말았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거칠다 해도 그것을 보고 내뱉는 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말은 배의 키와 같습니다.

세 번째로 야고보 사도는 말을 불에 비유합니다. 사소한 말 한 마디가 삶 전체를 불살라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시각은 이 세상이 타락과 부패에 갇혀 있고,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성경적 세계관과 그 맥을 같이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부패의 핵심적 원인으로 말을 지목합니다. 말의 파괴력, 말의 배후를 밝히기 전에 말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영향력에 주목할 것을 촉구합니다.

 

성경 암송과 글쓰기

말씀의 타락을 막고, 말씀을 회복하고, 이름을 바로잡고, 사랑으로 진실을 말하기 위해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요? 먼저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말을 적게 하고, 천천히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경 암송과 글쓰기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듣고, 기억에 남는 대목들을 암송하는 버릇을 키워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모세오경을 암송합니다. 그들이 외운 말씀은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처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119:105)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말씀이 심긴 사람들이라고 정의합니다.

두 번째로 글쓰기입니다. 글은 말보다 더 깊이 생각하게 해줍니다. 글로 쓰면 자신의 마음을 보기가 더 쉬워집니다. 글쓰기를 통해 말을 적게 하고 천천히 부드럽게 말하는 연습을 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어느 인터뷰에서 러시아 음악을 계속 연주하면서도 질리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의 일부거든요." 우리 안에 말씀이 있고 우리가 그것의 일부가 된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셨던 주님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시대가 어둡습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심긴 말씀은 사랑으로 진리의 길을 걸으라고 말합니다. 그 길을 걸을 때 말씀은 내 발의 등이 될 것이며 내 길의 빛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과 선택, 태도와 사고 유형은 우리 안에 심긴 하나님의 말씀에 연결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 역시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로 찬란하게 빛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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