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야고보서 3:9-12).

말씀을 듣는 시기

우리는 티끌과 같은 존재입니다. 신앙은 자기 존재의 한계를 깨달을 때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기 위해서는 그러한 한계를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가 진리임을 확신한 다음에도 문란한 생활을 그만두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저를 순결하고 절제하게 만드시되 아직은 그리 마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집어 들고 읽으라"는 어린아이들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라 여기고 성경을 집어 들고 눈에 들어오는 첫 구절을 읽었습니다. "방탕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로마서 13:13-14). 이 말씀을 읽은 즉시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의 빛으로 가득 찼고 의심의 그림자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불의의 세계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지옥 불이 타오르는 불의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들은 세상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습니다. 죄는 있지만 지옥 불이 타오르고 있을 정도로 끔찍한 곳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런 마음은 어거스틴이 가졌던 마음과 유사한 마음입니다. 어거스틴은 방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방탕함이 너무 좋았기에 '아직은 그리 마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태로는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아이들을 보내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희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세상이 주는 쾌락을 거절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구절은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제자라면 당신처럼 세상에서 환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절망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추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복음은 결코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는 죽음 이후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해도 복음이 주는 평안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다스리라고 주신 세상에 대한 통치력을 상실했습니다. 그 핵심적인 원인이 그의 말을 다스리지 못한 데 있습니다. 혀를 다스릴 수 있었다면 세상을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혀를 다스릴 수 없다면 여전히 재앙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말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온 세상에 독이 퍼졌습니다. 지옥의 불이 창조 세계에 옮겨 붙었습니다. 세상은 '불의의 세계'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말이 나오는 마음이 나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혼돈의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쪽에는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말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고 사람은 눈에 보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세계에 계시고 사람은 이 세상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두 세계를 이어줍니다. 하늘로부터 이 땅에 와서 씨앗처럼 뿌리를 내립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뿌려지고 싹을 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늘과 땅은 연결되고 통합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말이 하늘과 땅을 분리시킵니다. 사람은 말로 하나님을 종교에 가두고, 사람들을 그분으로부터 분리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나 그가 속한 공동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윌이라는 신학자가 "만일 하나님께서 축복을 받으시면 사람들도 축복을 받는 것이다. 만일 이웃이 저주를 받는다면 하나님도 저주를 받으시는 것이다."라고 말했듯이, 말은 신학적 문제입니다.

사람의 말의 타락의 심각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말의 타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화시켜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 말씀의 생명력을 앗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세상은 온갖 악이 횡행하는 불의의 세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 심각성을 볼 수 있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긴 새로운 피조물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보시는 주님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들까지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단절되어, 하나님의 뜻과 멀어지고 지옥 불이 타오르고 있는 불의한 세계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

그런데 주님은 그런 사람들을 개인으로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불러 반드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공동체들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는 완벽한 공동체를 이루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대로 사는 공동체야말로 복음이 기쁜 소식이며 희망임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유일하고도 온전한 방법임을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방식대로 살지 않는 나라가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것이 새로운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3:34).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이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분의 심중에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오직 유일한 비결,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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