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 묵상” 아홉 번째 시간인 오늘은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는 말씀을 함께 묵상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 계명을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때로 나쁜 의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출애굽기 1장에서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의 사내 아이들이 태어나면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 산파들이 사내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왕에게 목숨을 걸고 거짓말을 하는 장면입니다. 이런 것을 묵상하다보면 오늘의 계명,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단순히 사실을 말하고 말고의 문제를 넘어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계명은 우리의 말이 누군가를 살려 주는 말이 되는가의 문제입니다.

구약성서 학자들에 따르면 십계명의 아홉 번째 계명은 본래 재판에서 일어나는 일과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계명을 자세히 보면 “거짓말하지 말라”가 아니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입니다. 구약성경 시대의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증인입니다. 증인의 말은 피고인의 목숨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은 재판에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말에 대해서 신중할 것을 가르쳐 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법정에서의 증언만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말일까요? 일상의 모든 말이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통해서 영혼이 상처를 입고, 고통 가운데 몸부림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시편 5편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나이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 같다”는 말의 의미는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사람을 해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한 사건을 돌이켜 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말이 있습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고, 나의 영혼을 죽이는 비수와 같은 말이 그 사건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오늘의 십계명의 말씀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라”입니다.

울어 주는 힘

욥기에 보면 고통 가운데 있는 욥에게 친구들이 찾아와서 대화하는 내용이 길게 소개됩니다.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욥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으로 욥의 고통의 이유를 진단하고,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욥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들입니다. 그래서 욥은 자신을 위로하러 온 친구들을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욥 16:2)이라고 부릅니다. 친구들은 스스로를 위로자들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욥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말에 사랑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으로 욥의 고통을 진단하고, 해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전부 자신들의 생각일 뿐, 진정으로 욥의 마음을 공감하고 헤아리는 말들이 아닙니다. 욥이 가장 위로를 받았던 때는 친구들이 처음에 찾아와서 함께 울어 주었을 때입니다(욥 2:12-13). 칠일 동안이나 친구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함께 울어 주었을 때, 욥은 가장 큰 위로를 받습니다.

배우 차인표의 이야기를 한 책에서 읽게 되었습니다. 배우 차인표가 4살 때, 지하실에 난 쪽창에 머리를 넣었다가 끼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머리가 큰가 창문이 큰가 한번 대보려다가 머리가 쑥 들어가버렸는데, 빠지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창이 지하실 쪽으로 나있어 4살짜리 차인표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하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어둠뿐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머리는 빠지지 않고, 보이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입니다. 그때 옆에서 놀고 있던 형이 이 모습을 봅니다. 한 살 더 많은 5살짜리 형이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서 5살짜리 형이 한 것은 하나입니다. 동네가 떠나갈 듯이 운 것이었습니다. 그 울음 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달려와서 아이를 꺼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배우 차인표는 이것이 “대신 울어 주는 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욥의 친구들도 처음에는 “대신 울어 주는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욥의 친구들이 자신의 생각으로 욥의 고통을 진단하고, 해석하고, 조언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 이유는 함께 울어 주던 사랑이 그들의 말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사라져 버린 말은 사람을 세워 주지 못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 8:1). 아무리 뛰어난 지식을 드러내고, 올바른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는 말은 사람을 살려 주지 못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

우리는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말은 사람을 살리는 말이 되고 있습니까?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말을 하고 있습니까? 한국교회사에서 서서평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는 큰 감동을 줍니다. 서서평 선교사는 조선에 의료 선교를 온 백인 여성 선교사입니다. 조선에 와서 22년 동안 병든 자와 고아와 여성을 위해 일하다가, 나중에는 자신도 병들어 1934년 조선땅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서서평 선교사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몸져 누워 있을 때 특별한 경험을 하나 합니다. 어느날 서서평 선교사가 잠시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그 사이에 천국에 다녀온 꿈을 꾸었다고 말합니다.

꿈에 서서평 선교사가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자, 몸이 건장하고 턱수염이 많은 수문장이 서서평을 못 들어가게 막더랍니다. “왜 못 들어가게 해요?”하고 물으니, “당신은 안 됩니다”라고 말합니다. 서서평이 설명을 합니다. “나는 천국에 들어갈 자격인 신앙을 가졌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고, 또 예수님이 모범을 보여 주신 대로 실천하며 살아온 사람이에요. 당신이 누구이기에 못 들어가게 막는 겁니까?” 그러자 수문장이 “나는 베드로요. 글쎄, 당신은 못 들어간다니까?” 라고 대답합니다. 서서평이 “혹시 사람 잘못 본 것 아니냐”고 물어보자, 베드로는 “당신이 조선에서 온 서서평인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서서평은 물어봅니다. “도대체 내가 왜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까?”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의 그 성급한 성질을 고치고 오지 않으면 못 들어간단 말이요.” 서서평 선교사는 성격이 급했던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천천히 하자는 의미로, “서서히, 평안하게”라는 뜻의 “서서평(徐舒平)”이라는 한글 이름도 지은 것입니다. 결국 서서평 선교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열두 진주로 단장된 천국 문만 잠깐 보고 되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난 서서평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마 5:5)고 했는데, 성질 사나운 자신이 감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며 탄식했다고 합니다.(백춘성, 『조선의 작은 예수 서서평』)

이 이야기는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한평생 병자와 고아와 가난한 자를 위해서 헌신했던 “조선의 작은 예수” 서서평 선교사에게조차 하나님은 그 삶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급한 성품을 돌아보라고 하셨는데, 우리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돌아보기를 원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모습 중의 하나는 우리의 급한 성격에서 나오는, 생각 없는 말들입니다. 마태복음 12:36에서 예수님은 심판 날에 내가 했던 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과연 내가 장차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은 내가 했던 말들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시겠습니까? 나의 말이 사람을 살려 주는 말인지, 나의 말은 사랑 가운데 다른 사람을 세워 주는 말인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