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서 4:1).

싸우는 사람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의 후예답게 사람들은 각자 옳다고 생각하는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들 가운데 자신이 선악의 구별을 너무 가볍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자신의 옳음을 확신하며 말들을 쏟아내고 있지만 그렇게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없어 보입니다. 자신의 입장에 따라 춤추고 있는 선과 악의 가벼움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선생님'이라 부르며 다가온 청년을 향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말하는 선, 인간이 말하는 악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선악의 대립을 절대화할 수 없고 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선과 악을 알 수 없다거나 선과 악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 역시 아닙니다. 인간은 선과 악을 구분해야 합니다. 다만 더 선한 것과 덜 악한 것을 식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그렇게 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4:1을 통해 그런 인간의 실존을 보게 합니다. 피상적으로 현상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먼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바라보면 우리는 결과적으로 우리 안에 있는 정욕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싸우고 다투는 것으로는 올바른 길로 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싸우기를 좋아하는 정욕

야고보 사도는 교회 안에서 일어난 분쟁과 다툼을 어두운 곳에 밝은 조명을 비추듯이 폭로합니다. 그의 어조는 거침이 없고 단호합니다. 교회 안팎에서의 싸움과 다툼은 대의명분이나 신학적 수식어를 갖다 붙인다 해도, 세상적인 탐욕 때문에 일어납니다. 싸움을 즐기는 육신의 정욕을 따르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 죄 때문에 교회는 분쟁에 휘말립니다.

오늘날 교회 안팎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직분을 내세우고, 공로를 내세우고, 옳음을 내세우면서 싸움에 합류합니다. 모두가 뒤엉킵니다. 아무도 불의를 당하지 않고, 불이익을 당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정에까지 가서 싸웁니다. 대의명분이나 신앙적인 이유들을 내세우지만 그들의 속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핵심을 찌릅니다. 야고보 사도는 싸움으로 몰고 가게 된 근본적인 동기를 지적합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싸움 '폴레모스'는 격한 말입니다. 전쟁이라는 의미입니다. 말 그대로 칼을 들고 상대를 죽여 없애는 물리적인 전쟁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2절에서 이어지는 것처럼 살인하고 시기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처럼 매우 격한 의미를 간직한 말입니다. 여기서 시기한다는 말은 '젤루데'입니다.

싸움과 다툼은 겉으로 드러나기 훨씬 이전에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것을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이라고 하였습니다. 원문에 좀 더 가깝게 표현하자면 "당신들의 지체 안에 있는 싸우기를 좋아하는 정욕으로부터"입니다. 인간의 속에 악한 방향으로 달려 나가는 열정(에쩨르)이 있습니다.

앞서 야고보 사도가 정욕에 이끌려 시험에 든다고 했던 그 정욕과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앞에서 사용한 정욕 '에피쑤시아'는 어떤 대상을 향해 일어나는 욕망을 가리킨다면, 여기서의 정욕(헤도네)은 그것에 머물러 즐기는 모양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싸우기를 좋아하고 즐기는 정욕입니다. 말다툼이나 분쟁, 옳고 그름에 대한 주장들은 '싸우기를 즐겨하는 정욕', 곧 상처주고 헐뜯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는 악한 정욕의 불을 꺼버리지 않으면 결코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이유에서라도 마음속에 싸우기를 즐기고 좋아하는 정욕이 자리하고 있음을 생각하며 싸움을 멈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닮아

우리는 궁극적으로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집에 돌아오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덥석 안아주며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용서하고 위로하고, 잔치를 열어 주시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 6:36)고 말씀하셨습니다. 싸움을 즐기는 정욕에서 벗어나 자비하신 아바,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는 불안에 떠는 노예의 영이 아니라 아들의 신분을 주시는 양자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그 영 안에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영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친히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롬 8:15-18 참조).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벧후 1:4)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주님의 영이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서 교회가 제 모습을 찾는 일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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