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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으로 보는 분별의 흑역사 (1)
박준형 칼럼니스트  |  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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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1.03  05:3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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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문

누가 분별이 쉽다고 했나?

- 나는 결혼을 앞두고 있다. 지난 5년 간 연애를 한 여인이 있다. 우리는 결혼을 하기로 작정을 한 사이다. 문제는 우리 사이에 부모가 끼어든 것이다. 중매자리가 난다. 만났다. 만나보니 이전 여인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더구나 나중 여자 측 모든 조건이 앞으로 나의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 것 같다. 너무 3류 소설다운가? 부모는 이 여자를 민다. 하, 어떻게 하나?

- 나는 선교에 부름 받은 젊은이다. 최근 아프리카로 단기미션을 두 차례 가면서 나의 마음이 굳어졌다. 현지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너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하라!” 돌아와 장기선교를 가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담임 목사님과도 상의했고, 파송 선교단체를 물색하기도 했다. 어느 날 담임 목사님이 부르신다. 교회가 추진하는 선교 방향이 그 나라하고는 맞지 않으니 먼저 국내 선교를 하라고. 오잉!

이런 골치 아픈 상황의 한가운데 여러분이 덩그러니 혼자 있다면 쉽게 분별하고 결정할 수 있겠는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미 여러분의 삶에서 이런 상황을 접해봤다면 어떻게 했는가? 흥분한 상태에서 바로 의사를 결정해 버렸는가? 분별의 과정을 거쳤는가? 아니면 혼자서? 그 결과는 어땠나?

노영심의 <별 걸 다 기억하는 남자>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전화 걸 때 처음에 ‘여보세요’ 하는지 ‘죄송합니다’만 해야 하는지, 번호 8자를 적을 때 왼쪽으로 돌아야 할지 오른쪽으로 돌아야 할지, 고깃집에서 쌈을 먹을 때 쌈장을 바르고 고기를 얹을지 아니면 고기부터 얹고 쌈장을 바를지’ 혹은‘ 교회 야유회에서 누가 뜬금없이 노래를 시켰을 때 찬송가를 할까 트로트를 할까’를 먼저 기도하고 결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가 내 생각을 움직이는가』로 유명한 세계적인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하루 통상 1만 번 정도를 결정하며 산다는 데, 이 모든 소소한 일들을 일일이 분별하며, 좋고 나쁘고를 분리하며, 혹은 기도로 그때그때 울부짖으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고 실행하며 산다면, 그런 사람은 이미 1급 망상장애와 편집증으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면밀히 결정하고 분별하며 살 수 없다. 하지만 소위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장소에서 중요한 결정을 하려면, '구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취하는’ 분별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인생사를 그날 아침 기분(혹은 날씨)으로 결정하거나, 옆집 할머니의 간섭에 못 이겨 결정하거나, 잘 나가던 TV 코미디 프로그램에 나온, 용하다는 ‘부채도사님’을 찾아가 물어보거나, 혹은 노영심의 <별걸 다 기억하는 남자>를 부르다가 문뜩 떠오르는 영감으로 결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다는 투자의 귀재 조지 소로스가 "오늘날 그 누구도 그녀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노리나 허츠의 조언처럼, 뇌의 스위치를 끄지 말고,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분별해야 하는데, 이건 쉬운가?(노리나 허츠는 최고의 수재만 간다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 출신이다) 그리고 그녀는 오늘날 가장 통찰력 있는 학자 중의 한 명으로 칭함을 받는다고 하니, 어떤 사안이든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혜안이 있다고 믿을 수도 있겠다. 그녀에겐 이런 분별의 과정이 쉬울 수 있겠지만, 나같이 내놓을 것 하나 없고, 뚜렷이 인정받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조차 여전히 굳건하지 못하고, 육과 영 그리고 세상과 하나님의 중간에 샌드위치 되어 낑낑대며 사는 지극히 평범한 크리스천에게 분별은 여전히 난제다. 나에게 분별은, 그 말 자체도 어렵고, 굳이 분별을 하려고 하면, 어디가 머린지 꼬리인지도 분간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위기의 상황에서 이소룡이 쌍절봉 하나로 적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처럼 문제 해결이 쉬웠다면, 오늘날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까지 뒤죽박죽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계적으로도 지금과 같이 무분별하고 예측불가능하고 복잡다단한 세상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멀리 갈 필요도 없이, 21세기 세계의 지평을 보라.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로 가른 미국의 2001년 9·11 사태와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 우리들의 분별하고는 관련이 없는 걸까? 한국의 어느 교회가 필자가 일전에 다녔던 삼성그룹 본사처럼 수천 억을 들여 교회 건물을 지었다는 것은? 2대에 걸쳐 중동전쟁의 한가운데 서 있던 조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아들)을 대한민국 평화를 위한 기도회에 초청하는 일은? 한쪽에서는 4·16 세월호 추모 모임을 경건하게 진행하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보란 듯이 짜장면 파티를 여는 것은?

나라 일이건 개인 일이건 교회 일이건, 우리들이 분별하는 수준이란, 가톨릭 예수회 분별의 스승 토마스 그린 신부가, 역시 그의 스승과도 같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저자 자크 기예의 말을 인용해 말한 바와 같이, '겨우 어둠 속에서 더듬어 찾는(grouping)' 꼴이다. 시쳇말로, 뭐가 똥인지 오줌인지 모르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헨리 블랙커비는, “현대사회는 선지자 예레미야 때처럼 사람들이 얼굴을 붉힐 줄 모르는 지경으로까지 황폐화됐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소위 전문가건 아마추어건 할 것 없이, 분별을 잘하지도 못할 뿐더러 분별의 상황에 놓이는 자체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루하고 건조하고 불분명한 분별의 과정에 대한 인내가 없을 뿐더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어느 날 길 가다가 '쨘’ 하고 나타나 직접 얼굴을 맞대고 분별의 결과를 일러줬다 해도, 우리는 결국 돌아서서 왔던 길로 되돌아가고 만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백지상태로 순종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우리들의 머리가 너무 커졌고, 할 일은 끝도 없고, 세상은 핑핑 돈다. 우리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며 하루하루 그저 빠른 결정과 빠른 행동만을 좇으며 소비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감각적이고, 충동적이고, 기계적이고, 실용적인 인간들이 되어 있다. 우리의 믿음이라고 뭐라 다를까? 다르다면 이게 더 문제다. 삶에 일관성이 없다는 것은 삶의 균형을 잃고 있다는 증거이며, 삶과 믿음이 제각각이란 것이며, 이런 종착점은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파멸이다. 단, 그게 언제냐는 시간의 문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인간들은 원래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분별의 과정을 좋아하지 않았던가? 그들에게는 오직 결과만이 중요했던가? 인간들은 원래 생각하기조차 싫어했나?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 오묘한 분별의 세계, 헨리 나우웬이 말한 것처럼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나가는 과정'에서 등돌리게 했는가? 인간의 분별력에 대한 원초적 공포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우리는 맨날 왜 이 꼴인가?

성경에 그 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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