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야고보서 4:4-7).

벌레만도 못한 인생

인간은 은혜라는 단어를 깊이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면 은혜이고 해롭게 느껴지는 것은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은혜란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며 사랑입니다. 호흡하는 공기처럼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인간은 은혜를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은혜는 자기 존재의 한계를 느낀 사람에게만 열리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고난의 풀무불이 필요합니다. 고난의 풀무 불을 통과하면서 그동안 자신이 믿고 신봉해왔던 모든 것들이 다 타버리고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달을 때, 그동안 자신이 누리고 살았던 것들이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신앙의 여정은 어쩌면 그것을 깨달아가는 여정일 것입니다. 사람은 극한의 상황에 처할 때 비로소 자신의 한계와 정체성을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순종함으로써 그것을 하나님께 보여드렸습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신발을 벗어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새벽, 닭 울음소리를 듣고 통곡해야 했습니다. 그 자리는 모두 존재의 한계를 경험하는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벌레만도 못한 인생임을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온전히 하나님을 향해 돌아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리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한 분만이 온전히 소망이심을 인정하게 됩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간음한 여인들아”라는 표현은 현대의 독자들에게는 남성우월주의 표현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표현이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를 남편과 아내로 표현한 이후 선지자들은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아내와 남편의 언약적인 관계인 결혼은 배타적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무조건적인 충실함이 요구됩니다. 만일 배우자 이외의 상대를 만난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배우자와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영역을 의미합니다. 세상을 향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간음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 우리의 나누어진 두 마음을 치료하는 시작점입니다.

은혜

두 마음을 극복할 수 있도록 야고보 사도는 두 가지 은혜를 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5절은 해석도 번역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5절은 성경에 따라 번역이 다릅니다. 여기에 예시한 구절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는 말씀 그대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까지 시기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 사실이 바로 은혜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빼앗긴, 간음하는 아내와 같은 성도를 '시기하도록 갈망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은혜인 것입니다. 세상에 정신이 빠져 있는, 간음한 여인과 같은 성도들에게서 그분은 한 번도 눈을 떼신 적이 없으십니다. 한 번도 당신의 마음을 거두신 적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은혜입니다.

더 큰 은혜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6절은 그 대답으로 잠언 3:34을 인용합니다.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더 큰 은혜란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곧 하나님께 순복하고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주어진 은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시기하시기까지 사모하시는 것이고, 그보다 더 큰 은혜는 그런 변함없는 사랑을 깨닫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낮출 때 받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세상 정욕 때문에 마음이 나뉠 때, 가장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의 권위와 주권 아래 엎드리는 것입니다. 주권, 결정권, 선택권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세상을 움직이는 마귀의 권세에 대항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두 마음의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입니다. 그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고 인간을 유혹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애초부터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릴 때 마귀는 인간을 더 이상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은혜라면, 인간이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은 더욱 큰 은혜인 것입니다.

가장 큰 은혜

주님은 더 큰 은혜를 넘어 가장 큰 은혜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가 바로 그것입니다. 가장 큰 은혜는 다름 아닌 '자기 비움'(케노시스)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5-11).

예수는 자신을 비우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가장 낮고 천하고 비참한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의 높여 주심으로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을 받으셨고 영원한 만물의 주인이 되셨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것에 주안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과 반대되는 일을 복음은 요구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가장 큰 은혜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에서 우리는 전도된 복음을 목격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모든 문제의 해결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높아지라는 것입니다. 성공하라는 것입니다. 경쟁에서 이기라는 것입니다. 큰 사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인정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높아지는 것이 하나님 사랑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이 아니라 세상의 복음입니다. 그 전도된 복음에 이끌리는 우리의 마음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나뉘어진 마음이며 두 마음입니다.

사막의 성자라 불리는 푸코는 프랑스 상류사회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슬람 형제들이 살고 있는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이방인들을 섬기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고 술회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자신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 이르러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가장 낮은 곳에 계십니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를 만나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마 26:40) 말씀하셨습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가는 것, 자기 비움의 길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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