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서 친밀함으로(3)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이토록 내버려두시나이까? 정말 당신께서 나를 교회의 성직자로 부르셨습니까? 내가 성직자로서 합당한 인격과 성격을 갖추었단 말입니까? 나를 이곳으로 부르셔서 이처럼 처참한 일을 당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몇 날 몇 일 그리고 몇 개월을 울부짖으며 기도했다. 이민목회를 시작한 지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나이 40이 되기도 전에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사건들을 계속 경험했다.

1997년 추수감사절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이민목회를 시작했다. 미국인 여성 사제가 담당하던 교회에서 한인목회자로 나를 초빙했고, 그 이후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3년이 조금 지나자, 교우들은 예배 공간을 넓히려고 교회 제단 공사를 하기로 했다. 건축설계사 몇 분의 자문을 구해 공사 비용을 산출했다. 예상보다 공사 비용이 많이 나오자, 교우들이 내린 결론은 “우리가 직접 공사를 하자”였다. 나는 전문가들이 설계하고 공사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교우들은 내가 미국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민자들의 사정을 모른다고 말했다. 나를 좋은 신부로 인정해 주었지만, 당신들의 아들 연배인 나를 지도자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여러 가지 논의와 과정을 거쳐 결국 교우들이 직접 공사를 하기로 했다. 교우들은 기쁘게 그 일을 담당했다.

그런데 공사 결과는 건축법 위반이었다. 특히 교회 제단의 계단이 심각한 건축법 위반이었다. 건축법 위반으로 교회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등 연쇄적으로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공사는 무위로 돌아갔고, 공사에 참여했던 교우들은 교회를 떠나게 되어, 교회는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그 이후, 문제 그 자체보다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또 갈등하기 시작했고, 그 갈등은 또 다른 갈등을 야기했다. 그 갈등의 소용돌이, 어둠의 터널 속에서 좌절하여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신부로 부르셨는가? 나는 신부로서 교회를 감당할 성격과 인격을 갖추었는가?” 교우들이 나를 배척하는 것 같았다. 어떤 교우는 “신부님은 교회 목회보다 신학교 교수를 하셨어야 해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두려웠다. 만일 그들이 나를 배척하면 어떻게 하나? 가족을 어떻게 돌보나? 여기서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두려움을 넘어 하나님의 작품으로

두려움과 혼란, 좌절 가운데 던진 주된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누구인가?”였다. 자아상에 관한 책들, 인간학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나를 이해하고, 인간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작품으로 살도록 부름받았다.” 인간됨은 하나님의 작품이 되어가는 거였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입니다”(엡 2:10). 나는 스스로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시편 139편의 고백을 하게 되었다.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시편 139:14). 시편 139편은 인간 창조와 관련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다. 하나님의 전지하심(1-6절), 무소부재하심(7-16절), 전능하심(17-19절)을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고,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는 고백이다.

감사하게도 이 시기에 로버트 클린튼이 쓴 『영적 지도자 만들기』라는 책을 읽었다. 로버트 클린튼은 성서와 역사 속에서 영적 지도자들의 성장 과정을 연구 조사했으며, 하나님께선 영적 지도자를 만드실 때, 반드시 고립, 배척, 고독의 과정을 겪게 하신다고 했다. 요셉, 모세, 다윗, 많은 예언자들, 사도 바울 등이 그 과정을 겪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지금 이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하시는구나!”, “지금이 내게는 고립, 배척, 고독의 과정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두려움은 물러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과 평안, 인도하심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내게 평안과 확신을 준 영적인 멘토가 있다. 버지니아에서 사목을 하시는, 10년 선배인 한성규(발렌틴) 신부님이다. 그분은 내게 자주 말씀하셨다. “신부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종, 사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보호하시니 걱정하지 마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 선택받고 기름부음 받은 종으로서의 신분 의식, 자의식, 사제 의식 속에서, 하나님께서 아시고,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섭리하심을 늘 상기시켜 주셨다. 그분의 말씀이 나의 자의식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었다.

 

자기 거부를 넘어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가는 동안 겪는 많은 좌절과 아픔은 자아상에 영향을 미친다. 꿈이 좌절되고 주변 환경이 여의치 않으면, 나 스스로를 작고 보잘것 없게 만들고,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나는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의 배척과 거부가 두렵다. 스스로에게 보잘 것 없는 존재,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낙인을 찍는다. 결국 스스로의 존재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려면, 비록 자신이 부족하고 모자랄지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빚으시고, 훈련시키시고, 당신의 작품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편 139편에서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내가 어머니의 태에서 만들어질 때부터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섭리로 인도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가운데 두려움에서 벗어나 “내가 있다는 놀라움, 나를 통해 하시는 일의 놀라움,” 그 신비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난 뒤에 하늘이 열리며 이런 소리가 들려 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 공동). 이스라엘 백성들뿐 아니라, 세계 모든 종교에서 본래 하늘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메시아로서의 역할을 막 시작하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음성은 두려움의 음성이 아닌, 새로운 존재의식의 음성이었다.“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이다. 사랑받는 존재의식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세상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 부모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두려움 없이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부모 사랑의 결핍을 경험한 사람들, 부모의 인정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두려움이 많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의식을 모두 바꾸길 원하신다. 성장 과정에서 사랑이나 인정의 결핍을 경험했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나를 아시고,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섭리하시며, 나를 사랑받는 존재로, 당신의 작품으로서 빚고 계신다. 하나님의 작품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로 나 스스로를 받아들일 때, 다른 사람들의 거부와 배척에 대한 두려움, 인정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존재, 하나님의 작품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존재의식이 두려움을 몰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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