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야고보서 4:11-12).

치명적인 위험

C. S. 루이스의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조카 악마가 삼촌 악마인 스크루테이프에게 말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원수의 졸개(그리스도인)가 진리 한 조각을 발견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스크루테이프는 빙그레 웃으며, "진리의 조각을 발견하고, 그것을 전부로 아는 것보다 안전한 경우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의 일부를 전부라고 착각하는 것보다 사단에게 유리한 상황은 없다는 것입니다.

사단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합니다. 사단도 얼마든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영들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라"(요일 4:1)고 경종을 울립니다.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일은 진리의 조각을 전부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지만 정욕을 부채질하여 죄의 노예로 만듭니다. 우리는 진리의 조각을 전부로 아는 것의 치명적인 위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진리의 조각들

1) 영접: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단어는 영접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분명 진리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모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입술로만 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것은 돈과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방식인 사랑과 섬김으로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2) 이신칭의: 이 교리 역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진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하나님과 인간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언제나 양방향입니다. 누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느냐는 사랑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주도권을 무력화시킵니다. 만일 하나님의 주도권만 강조되고 인간의 반응을 무시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시혜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도권은 강조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반응 역시 강조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반응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사랑의 요소입니다.

3) 견인: 견인이란 한 번 정해진 구원은 취소될 수 없다는 칼빈의 5대 강령 가운데 하나입니다.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전능하심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상 견인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언제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는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시지 않지만 인간은 언제든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떠났다가도 되돌아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살을 택한 유다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4) 다원주의: 예수 이외에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을(행 4:12) 성경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붙들어야 할 말씀이지 그리스도인들이 지키고 있어야 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언제나 진리 그 자체로 완벽합니다. 진리는 인간이 지킨다고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지키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다원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믿을 수 있도록 서로 사랑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진리의 조각들이 있습니다. 진리의 조각을 전부로 신봉하면 다른 이들을 섣불리 판단하게 됩니다. 부족한 진리의 잣대로 이웃들을 판단하면 진리의 본질인 사랑을 붕괴시키게 됩니다. 야고보서 4:11-12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두 마음과 교만함

10절에서 언급한 교만함에 대한 경고를 공동체 내부에 적용합니다. 신자가 두 마음이 되면, 세상이 교회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런 교회에서 '예수 믿고 복 받는 것이 복음의 전부'인 것처럼 가르치면, 그런 교회에는 아예 세상이 교회 안에 들어와 진을 칩니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 한복판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잣대로 교회를 제단하고 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잣대로 교회를 세우고 판단하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세상이 교회 안으로 흘러 들어오도록 길을 열어 주는 '두 마음'에 대해 확실한 처방을 내린 바 있습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는 것입니다. 주 앞에서 낮추면, 하나님의 것들이 개인들 안으로, 교회 안으로 흘러들어옵니다. 하늘의 신령하고 풍성한 생명들이 세상의 것들을 몰아냅니다.

반대로 두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면 서로 깎아내리며, 거슬러 비방하는(카타라레이테) 말을 하게 됩니다. 서로 반대하고 싸울 뿐 아니라, 비방하여 깎아내리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형제를 판단(심판, 크리논)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과 관점을 가지고 믿음의 형제들을 차별하고 판단할 뿐 아니라, 세속적인 판단 기준이 절대적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처럼 행세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

그런 자들을 향해 야고보 사도는 '너는 누구냐?'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숨어 있는 아담을 향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고 말을 거시는 하나님이 떠오릅니다.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그것을 추구하는 '두 마음'을 정당화하기 위해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형제들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들에게, 야고보는 형제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베풀고, 오래 참고, 온유하게 대하라는 식으로 접근하지도 않습니다. 정곡을 찌릅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의 마음속에 자라난 '교만'을 정 조준합니다.

문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가 너무 높아져 버린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나. 주변의 이웃과 형제들에게 비방과 심판을 일삼는 태도는 그에 따른 부수적인 행동들입니다. 궁극적으로 교만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입니다. 세속을 추구하고 형제들을 깎아내리다가 결국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헤이스)이십니다. 율법을 세우고 명하신 분도 한 분입니다. 심판자도 한 분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심판 받습니다. 오직 그분만이 기준이시고 심판자이십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그분만이 능하신 분(호 두나메노스)입니다. 그분만이 구원하실 수 있고, 그분만이 멸하실 수 있습니다.

겸손

겸손이란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이웃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위치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 위치는 가변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그 위치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겸손은 인간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의무입니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나 말이 아닙니다. 사랑에 의해 그 진위가 가려집니다. 사랑에서 비롯되는 섬김만이 오직 유일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척도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또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비방, 즉 깎아내리는 것과 잘못을 지적하는 것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깎아내리는 것은 시기, 질투와 욕망에 휘둘리는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반면에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사랑의 중요한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향한 헌신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잘못된 길을 가는 것을 보고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만히 있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상황이 되어도 부모는 자녀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가 돌이키기를 기다리며 기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방은 다릅니다. 교만한 영에 이끌리는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높아지려는 욕망에 휘둘려 관계를 망치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러한 인간의 실체를 가장 잘 파악하고, 말씀을 이용해 거짓 선지자를 만들어 내고 거짓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잠식합니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 하나님 앞에서 겸손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다른 이들과 그것을 나누고 공유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결정에 최종적인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 생각하고 판단하되,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판단하되 마지막 결정을 겸허하게 주님의 몫으로 남겨 놓아야 합니다.

시대는 어둡고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 모두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능력이 끝난 자리에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하지 않는 자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부득불 자랑해야 한다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약함을 자랑하길(고후 11:30)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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