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번 시카고의 긴긴 겨울 밤을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함께 보냈다. 1,65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작품이어서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읽는 내내 행복했다. 작가의 예기치 못한 죽음으로 인해 영원한 미완성품으로 남긴 했지만 카라마조프는 역시 카라마조프였다. 러시아는 도스토옙스키를 낳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존재 가치가 있다는 니콜라이 베르쟈예프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은 변덕을 부리는 양심과 부조리에 대한 통감, 청결한 신성성과  비열한 세속적 욕망이 세찬 줄기로 뻗어나가면서 인간 심리의 바닥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있다.  곳곳에서 서로 뒤틀리고 교차된 욕망이 홍수 때의 흙탕물로 변한 강물처럼 영혼에 쳐들어와 급소를 찔린 듯한 아픔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 소설은 난봉꾼 알렉세이 표도르비치 카라마조프의 죽음이 서사의 기초를 제공하고 그에게서 태어난 네 아들의 삶의 행적이 서사의 뼈대를 이룬다. 턱 아래로는 가죽 지갑 같은 커다란 혹이 매달린 표도르 파블로비치는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사업만큼은 성공적으로 꾸려 나갔다. 그와 첫번째 아내 사이에서 장남 드미트리가 태어난다. 그는 아버지에게 버려져 남의 손에서 성장하다가 어머니가 남기고 간 유산을 되찾기 위해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는데  미모가 출중한 그루센카를 두고 아버지와 연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일로 인해 아버지 표도르가 죽임을 당한 후  진범이 아닌데도 살해 판결을 받는다.

두 번째 아내에게서는 이반과 알료샤가 태어났는데, 이반은 급진적 합리주의의 사고를 받아들이고 전통 종교를 부정하는 이성적 무신론자로 그려진다. 그리고 표도르와 미친 걸인 여자 사이에서 태어난 스메르쟈코프는 표도르의 하인 취급을 받으며 자라나는데, 이반의 사상에 감화를 입고 실제로 표도르를 살해하고 만다. 하지만 범죄를 저지른 후 “신이 없어도 모든 것이 허락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감에 자살하고 만다. 마치 유다가 예수를 판 후 자살한 것처럼 말이다.

이반은 자신의 사상이 스메르쟈코프를 통해 부친 살해로 연결됨을 깨닫고 정신적 혼란을 느끼다가 거의 실성한 상태에서 자신이 범인이라고 법정에서 말하지만 판결을 전복시키지 못한다.  이반은 자신의 날카롭고 찬란해 보였던 사상의 실천 결과가 스메르쟈코프를 통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인지하고 절망감에 빠진다. 여기서 이반의 무신론적 인본주의 사상과 스메르챠코프의 범죄로 나타난 실천력을 합하면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셋째 아들 알료샤는 누구나 존경하는 조시마 장로가 머무는 수도원에 들어가 신실한 기독교인 수사가 된다. 이 소설의 화자는 알료샤가  “내 주인공”이라고 밝히고 있고, 도스토옙스키 작가 자신도 직접 카라마조프 연작 서사는 알료샤를 중심으로 펼칠 것이라고 밝힌 점을 감안한다면, 알료사가 이 소설의 주인공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이반의 역할이 알료사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전체  구조와 연계하면, 어쩌면 이반의 이야기는 알료사가 추구하는 구원에 이르기 전 단계, 즉 신의 도성의 문 앞에서 고민형 인간이라면 필수적으로 치러야 하는 인간적 회의 과정 혹은 영혼의 씨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식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 중 하나인 이반의 대심문관 극시는 실제로 가톨릭 추기경이 대심문관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죽임을 당하게 한 일이 일어났던 16세기 스페인의 세비야를 배경으로 한다.

극시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러하다. 아흔 살 고령의 대심문관의 주도 하에 수백 명의 신앙인을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화형에 처하는 세비야 광장에 예수님이 나타난다.  민중들은 그가 병자를 고치고 구원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다름 아닌 바로 예수임을 깨닫는다.  그런데 심문관은 그가 예수이심을 알면서도 그를 감옥에 가두게 한 후 밤에 몰래 찾아온다.

대심문관은 1,500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당신의 가르침을 실행하려고 열심히 살았지만 그 방법이 잘못된 것을 깨달았을 뿐이라고,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면 인간들에게 행복을 주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게 할 뿐이라고 말한다. 기적과 신비와 권위, 이것이야말로 교회를 지탱할 수 있는 힘인데 예수는 그 세 가지 모두 사람들에게 주길 거절했다고 비난한다. 덧붙여 당신 대신 우리가 교회를 지켜내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기적과 권위를 보여주고 있는데 왜 이제 나타나 우리 일을 방해하느냐고 하면서 이곳을 떠나라고 한다.  예수는 대심문관의 규탄에 다만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그의 핏기 없는 입술에 조용히 입을 맞춘다.

학창 시절 처음 이 대목을 대했을 때, 도스토옙스키의 기발한 상상력과 문학성에 심장이 뛰었고, 무신론적 이성론자의 매력과 위험성은 무엇이며 어디서 이 서사의 교훈과 맹점을 찾아야 하는가 고민하며 친구들과 토론을 벌였던 일이  기억난다.

그런데 정말, 예수님이 잠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다시 찾아오면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람들에게 황홀하게 다가갈 수 있는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마다하고 고난의 십자가만을 붙들 것인가, 이 질문의 화살이 내게로 향해온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여전히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세속적 욕망이 내 속에 남아 있는데, 예수를 다시 죽음으로 내모는 대심문관의 행위를 맹렬히 비난만 할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대심문관의 태도를 통해 내 속에 섞여 있는 혼합주의의 시발점이 무엇인가를 검토해 보는 것이 더 마땅한 태도가 아닐까?

여기서 작가가 이 극시를 통해 중점을 두고자 했던 것은 대심문관의 비신앙적인 태도에 대한 책망이 아니라 결국은 돌아 돌아 예수가 대심문관의 핏기 없는 입술에 입맞춤을 한 것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든다. 결국 이 극시의 주제는 어두운 협곡을 지나면서 하나님을 부정하려는 인생들을 향한 예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말하면 억지일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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