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흔히 스포츠가 연출하는 세계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합니다. 열정과 땀, 냉혹함과 눈물이 어우러져 쏟아낸 결과들은 관중과 관계자들의 가슴을 뜨겁게 혹은 시원하게 해줍니다. 영웅이 탄생하기도 하고 별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국제적인 행사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 대회에서“우리는 하나”라는 구호를 가장 많이 외칠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임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하나 되기를 애타게 부르짖는 것 같습니다.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들이 함께한 경기장에서도 “우리는 하나”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습니다. 정말 그러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어떤 이들에겐 그 외침이 공허하게 들리고 이질감을 부채질한답니다. 대체 무엇이 하나라는 말일까요? 또 어떻게 하나가 되어야 하나요? “하나다!”라는 외침이 크면 클수록, 그것은 현실이 아니라 강렬한 소망이며, 그 소망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래도 우리는 외쳐야 하겠지요? 방향이 옳다면 말입니다.

한국의 개신교는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라는 말 속에는 분명 한 분이시고 하나 되게 하시는 여호와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라는 헬라어 단어εν(헨)은 “본질상 동일한 존재”라는 뜻과 더불어 “동일한 목적을 가진 존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one으로  번역하는데, 그 속에 same과  unity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예수님은 자신과 여호와가 본질상 동일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0:30). 또 우리가 서로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요 17장). 우리도 하나님과 동일한 목적을 가진 존재의 삶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로 해석됩니다. 이 의미를 정치, 사회 영역으로 확장한다면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모든 인간은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하나입니다. 영적으로는 본질상 죄의 자녀라는 점에서 하나입니다.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입니다. 동시에 영원을 갈망한다는 점에서도 하나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남과 북은 하나요, 올림픽에 모인 각양각색의 젊은이들은 하나입니다. 그런데 같은 목적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로 하나를 생각한다면, 페어플레이와 승리라는 목적 안에서 올림픽 참가자들은 하나입니다. 기업의 성공이라는 목적 안에서 회사 구성원들은 하나이며, 자녀의 성공이라는 목적 안에서 부모는 하나일 수 있습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목적의 범위와 방향이 좁을수록 하나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목적에 종교, 정치, 경제 요소들이 개입하면 하나 됨은 깨어집니다. 현재 남과 북, 남과 남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건, 구성원들의 인간으로서의 본질과 본성이 달라서가 아니라, 추구하는 목적의 크기가 작기 때문일 것입니다. 목적이 작을수록 이를 위해 상호 조율하고 협력하기가 어렵습니다. 남북 대화의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이는 부부관계나 부모자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 됨을 부르짖는 사람의 수 만큼이나 분열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찌 극복할 수 있을까? 그러다보니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꼭 그런 하나 됨이 필요한가?’ 하나 됨의 가치와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꼭 하나로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물리적 통합은  더 큰 후유증을 낳습니다. 게다가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는 성경적 세계관과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하나라는 것이 목적에 있어서의 일치를 의미한다면 우리는 그 목적의 의미를 좀 더 넓게 포괄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제도나 방법론이 아니라 궁극적 관심과 비전에 관한 것으로 말입니다. 표현이 좀 어렵나요? 하나의 의미를 크게 생각할수록 하나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뜻입니다. 나머지는 하나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에게는 상호 존중과 양보와 협력이라는 가치의 수행 능력이 있으니까요.

성경은 진정 한 분이시며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할 대상은 여호와, 예수아, 프뉴마(성령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 됨의 의미와 내용도 현재보다 더 크게 확장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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