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Spirituality 71

앞으로 10회에 걸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를 함께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시면서 언제나 쉬운 말로 설교하시고, 일상의 평범한 소재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평범해 보이는 말은 수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원래 대가는 그런 법입니다. 무언가를 깊이 꿰뚫어 알고 있는 사람은 쉬운 말로 명쾌하게 가르치지만, 아무리 박사 학위를 많이 가지고 있어도 깊은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말은 번듯해 보여도 사람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언제나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습니다.

감춤의 비밀

예수님 말씀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일상의 구체적인 소재에 빗대어 말씀하시는 비유를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사실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비유는 사람들의 생각과 삶을 뒤흔들어서 하나님 나라에 응답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우리의 일상의 가치와 생각을 흔들어서 뒤집어 엎는 전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묵상하기 전에 오늘은 예수님의 비유가 가진 특징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감춤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감추는 것이 비유의 특징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사람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마 13:13). 심지어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혹시라도 깨달아 회개할까봐 두려워서 비유를 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3:15). 예수님의 이 말씀은 수수께끼 같습니다. 본래 비유의 목적이 더 쉽게 설명하는 것인데, 오히려 비유가 더 알아듣기 어렵게 하고, 진리를 감추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깊이 이해하면, 예수님의 비유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중요한 단서를 발견하게 됩니다. 비유가 감추는 역할을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충격요법

먼저 이 말씀이 하나의 역설적인 표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차정식 교수는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에서 “하나님이 깨닫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씀을 “하나님이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말씀을 하셨겠느냐”라고 해석합니다. 일종의 하나님의 충격요법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깨닫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오히려 ‘한 번 깨달아봐, 회개해 보라고, 아마 전혀 그렇게 할 수 없을걸?’ 하시며, 마치 약 올리듯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말씀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로 우리를 헷갈리게 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실망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이 실망을 듣고서 사람들이 말씀에 응답하기를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에 눈을 닫고, 귀를 막는 우리에게 얼마나 실망하셨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말씀에 눈을 닫고, 귀를 막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졌기”(마 13:15)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있는 무언가 악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눈과 귀를 닫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비유가 감추는 역할을 하는 것은 우리 편의 어떤 이유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말씀을 향하여 응답하지 못하도록 막아섭니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을 이해하는 두 번째 방법입니다. 한 마디로 비유의 감추는 기능은 결국은 우리가 초래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막고 있는가?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의 남부구치소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구치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재판이 진행 중이기에 형량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간절합니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후회로 괴로워하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구치소의 예배는 항상 간절하고 뜨겁습니다. 그날도 구치소에 있는 남자 수감자들의 예배에 참석했는데,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양을 그렇게 간절하고 뜨겁게 부르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울며 찬양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눈을 딱 감고 미동도 없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울며 불며 찬양할 때에도, 기도를 하고 설교를 하는 시간에도 이 사람들은 눈을 감은 채 조금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단 위에서 이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저분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길래 이렇게 말씀 듣기를 거부하게 만드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응답하는 것에 얼마나 부족합니까? 내 마음에 있는 악한 어떤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을 막아설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세상의 것에 관심이 가득해서 나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뜨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나의 삶을 매일같이 인도해가시는데, 우리는 삶의 두려움에 온통 사로잡혀서 나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내 삶에 원하시는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시는데, 우리는 욕심과 고집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말씀 대신 보려고 하고, 말씀 대신 들으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나의 욕심, 어두움, 두려움, 고집, 무관심, 이 모든 것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닫고, 귀를 막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양초와 성경

한국 개신교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백홍준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백홍준이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아버지 덕분이었습니다. 의주 상인이었던 백홍준의 아버지는 중국 봉천으로 장사를 갔다가 스코틀랜드에서 온 선교사 로스를 만납니다. 로스 선교사는 조선 상인들이 양초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서 양초와 함께 성경책을 나누어 줍니다. 백홍준의 아버지도 양초만 갖고 싶었지만, 성경과 같이 가져가야 한다는 조건 때문에 할 수 없이 한문 성경책을 하나 받아왔습니다. 그리고 의주의 집에 돌아와서 “무슨 책인지 읽어나 봐라” 하면서 성경을 아들 백홍준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그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내 성경에 몰입했습니다. 백홍준은 3년 동안 성경을 읽으면서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고, 나중에는 세례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 봉천으로 선교사를 만나러 갑니다. 마침 로스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돌아가 있었던 차라, 로스 대신에 와있던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 백홍준은 1879년 세례를 받습니다. 백홍준이라는 한국 개신교 첫 번째 세례교인이 이렇게 탄생된 것입니다. 이덕주 교수는 『쉽게 쓴 한국교회사 이야기』에서 이 이야기를 전해 주면서 제목을 “양초와 성경”이라고 정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초에만 관심을 보였지만, 백홍준은 성경에 응답했던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응답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많은 경우 양초에 응답합니다. 우리가 성경에 눈을 뜨고, 귀를 열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 안에 있는 욕심과 두려움과 고집에 응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응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생명력을 말씀을 통해서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눈을 떠서 보는 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 듣는 자, 마음의 완악함을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마 13:16).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생각과 삶을 뒤흔들며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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