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날마다 사도신경을 통해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지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일은 오늘날 교회에서 보기 힘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우리'라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성이 실종되어 있습니다. 공동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공동체는 복음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것을 드러내 주는 말이 '우리'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세 단어가 무엇이냐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으면 대부분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 세 가지는 '은혜', '사랑' 그리고 '교통'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서 '교통하심'은 '코이노니아'를 번역한 말입니다.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가르침은 많지만 '교통'이라는 말, 코이노니아에 대한 가르침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요즘 목사님들의 축도도 잘 들어 보면 교통이라는 말 대신 '감화', '감동하심'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만큼 코이노니아의 의미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입니다. 코이노니아에 대한 가르침이 없어진 것은 교회 안에서 참된 코이노니아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참된 코이노니아가 없다 보니 그 가르침 또한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코이노니아라는 말의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코이노니아를 직접 보고 자신도 코이노니아를 나누고 싶어 생명을 걸고 그리스도인 무리에 합류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 코이노니아는 강력한 힘을 가진 복음의 핵심 요소였습니다.

주후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령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자유와 함께 사유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가 주어졌지만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온 것은 영적 퇴보요, 타락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길 원하는 일부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사막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독신자들로 이루어진 수도 공동체들이 생겨났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었던 공동체와는 다른 부분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수도라는 특수한 목적을 가진 독신자들로 이루어졌다는 점에 있어 원래의 기독교 공동체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공동체라고 하면 수도원이나 수녀원을 떠올릴 만큼 독신자들의 수도 공동체가 곧 기독교 공동체라는 인식이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공동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자매로 만나 일상의 삶을 함께 나누는 확장된 대가족과 같은 모습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러한 초대교회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2세기 프랑스 리용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피터 왈도가 세운 공동체는 독신자들의 수도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가족들까지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왈도는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제도적인 교회 안에서 신앙의 만족을 누리지 못하던 사람들과 리용의 가난한 사람들이 그의 삶과 설교에 감화를 받고 그를 따랐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알렉산더 3세는 그들의 삶을 인정해 주었지만 주교의 허락 없이 설교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에 대해 왈도는 베드로의 말을 인용해 사람보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설교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래서 1184년, 루이 3세에 의해 파문을 당하고 그들의 공동체는 교회로부터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교회로부터 파문당하고 핍박을 받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설교 금지 명령을 어긴 것과, 고대 프랑스어로 번역한 성경의 사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이유는 그들이 수도자들의 독신 공동체가 아니라 초대교회와 같은 가족 공동체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독신을 택한 수도자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독신자들의 공동체는 교회에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로 인해 사람들은 면제부를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독신이기 때문에 가난으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가족이 있기 때문에 재산을 모으고 부자로 살아야 자녀들의 교육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사람들은 독신 수도 생활을 택한 사람들을 칭찬하는 대신 자신들은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명분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피터 왈도는 "코이노니아란 모든 신자들이 실행해야 하며 가족을 가진 모든 사람들도 공동체 생활을 해야 한다."라고 외친 것입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실제로 초대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이루자, 교회는 심각한 위협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부자로 살기 원하고 가난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습니다.

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심한 고문을 당하고 그들의 믿음을 바꿀 것을 종용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나무에 매달고 불태워 죽였습니다. 피터 왈도의 코이노니아 운동은 힘을 잃게 되었고 극소수의 숨은 제자들밖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마저 미국으로 건너가 조용히 살다가 장로교 교인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곳에서 초대교회 공동체의 코이노니아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메노나이트들입니다. 16세기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성인이 되면 자신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재세례파 가운데 온건파인 메노 시몬즈의 후예들을 말합니다. 모든 신자들은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 원칙이라는 견해에 따라 그들 역시 공동체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도 개신교와 가톨릭으로부터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 종교개혁 시대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잡히는 대로 살해당했지만 자신들의 신앙을 철회하거나 꺾지 않고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박해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재세례를 주장한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제 이유는 그들의 공동체적 삶에 있었습니다. 산상수훈을 중심에 둔 그들의 강력한 공동체의 실현이 기존의 종교 세력들의 눈에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박해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가 메노나이트나 아미쉬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전 가족이 참여하는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려 400여 년 동안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들의 참된 코이노니아에 있습니다.

코이노니아 혹은 코이노니아에서 파생된 단어들은 다양한 의미로 번역되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번역된 단어들은 '참여', '연보', '사귐', '교제', '나누어 줌', '동업', '통용' 등 17가지에 이릅니다. 그래서 이 단어들이 모두 같은 단어임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을 보면 코이노니아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쓰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 처음 코이노니아가 등장한 것은 사도행전 2장 42절입니다.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코이노니아)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느니라."

오순절 성령강림 후, 성령 충만해진 베드로는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담대하게 설교했습니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수가 무려 삼천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새롭게 제자가 된 사람들이 바로 이 말씀의 주어입니다. 이 말씀에서 사용된 '코이노니아'란 성도 간의 '코이노니아'를 말합니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기도란 준비된 기도문을 말합니다.

제자가 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가르침만 중요시하고 교제를 가볍게 취급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성경에서는 가르치는 것과 교제하는 것을 똑같이 중요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성도들이 모일 때마다 함께 떡을 떼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성찬식이 아니라 함께 모여 나누는 공동의 식사였습니다. 예식이기보다는 공동의 식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는 공동체 정신이 더 강했던 것입니다.

사도들이 계속해서 놀라운 일과 기적을 많이 나타내 보이자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44절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 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통용하다'라는 말 역시 코이노니아입니다. 통용이란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나누어 썼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모든 물건을 공유할 수 있을 만큼 깊은 교제를 실제로 나누었던 것입니다. 재산과 소유를 다 팔고 서로 나누어 주는 일이 실제로 그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실질적인 교제였다는 사실은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그것을 나누어 주었다는 성경의 기록이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세례 받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 식사하고 유무상통하면서 실제적인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세례를 받기는 하지만, 그들처럼 함께 모여 식사하고 유무상통하는 교제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밀라노 칙령으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사유재산이 인정되자 사람들은 그것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재물에 대해 청지기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초대교회에서도 유무상통하는 실질적인 코이노니아가 언제나 잘 이루어졌던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내용처럼 부자들끼리 모이고 편이 갈라지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반성하고 올바른 교제를 나누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것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지 못하는 것임을 그들은 잘 알았습니다.

오늘날 그러한 의식 자체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코이노니아가 사라지면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면 은혜가 사라집니다. 능력도 사라집니다. 하나 되지 못하는 교회에 능력이 나타나면 오히려 그것은 사람들의 믿음을 왜곡시킵니다. 능력을 확인해야 하나님을 믿겠다는 인간 중심의 사고가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면서 더욱 강한 기적을 원하게 됩니다. 자신이 행한 능력이나 은사에 감동되어 그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망각하게 됩니다. 가야 할 길을 가지 못하고 기적 신앙에 머물고 맙니다. 세상적인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연약하고 미성숙한 신앙에 머물게 됩니다.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나눔이 싫어 교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합니다. 코이노니아를 행하지 않는 것은 형제들을 미워하는 것이며 형제들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에 해당한다면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영생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요한일서는 그러한 사실을 너무도 분명하게 알려 줍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먹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요일 3:15-20)

미워한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이 말씀을 이해하는 핵심 포인트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미워한다는 사도 요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미워한다는 히브리 단어와 우리 말의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말에서는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 미워하는 것입니다. 즉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거나, 거짓된 마음으로 사랑하거나,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것 모두가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의 말은 그 형제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가 다 살인하는 자이고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살인하는 것입니다.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돕지 않는 것이 곧 살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로만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물을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 받은 징조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경고까지 덧붙입니다. 우리가 충분히 사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미진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되고 진실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였다고 해도 끝까지 주의하고 겸손하라고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코이노니아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 4:20-21).

형제를 사랑하는 데는 재산을 나누어 주는 일이 항상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심리적인 위로보다 내 이웃의 궁핍에 관심을 기울이며 실제적인 도움을 줄 때 우리의 사랑이 확증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31-40).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공동체는 한 교회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아는 사람끼리 시작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웃의 필요에 민감한 그리스도인들이 나의 가진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인 줄 알아 서로 나누면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사랑을 실천하면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구원의 완성은 코이노니아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하시는 십자가의 은혜로 인해 우리는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죄사함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나머지가 있습니다. 코이노니아, 즉 참된 교제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참된 코이노니아를 통해 유무상통하면서 하나님의 가족, 형제자매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관심하거나 경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의 '우리'에 담긴 참된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정녕 믿는다면 성도들 간의 교통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주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그 맛을 알고 그 기쁨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온전한 '우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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