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믿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는 뜻이다. 곧 성경말씀에 목숨을 걸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통하여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한 체험이나 지성적 연구로도 예수님을 알 수는 있다. 그러나 반드시 성경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교회와 가톨릭교회는 확연히 구별된다. 그리스도교회는 믿음과 삶의 절대 표준을 성경에 두고 있지만, 가톨릭교회는 교황에 두고 있다. 그리스도교회가 가톨릭교회를 비판할 때에는 언제나 ‘교황을 신격화하지 말라’는 것이 첫째 항목이다. 가톨릭교회라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교회가 성경을 절대 표준이라고 우기는 것은 바로 ‘종이 교황’(Paper Pope)을 믿는 것 아니냐, 그리고 교회가 성경을 낳았지 성경이 교회를 낳은 것은 아니라며 반론을 편다. 개신교회도 할 말이 있다. 교회가 성경을 낳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교회가 성경보다 우위라는 것은 전혀 아니다. 동정녀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았다고 해서 마리아가 아들 예수님보다 우위일 수는 없다. ‘교황 무오론’과 ‘성경 무오론’의 충돌이다.

이런 논쟁은 끝도 없고 한도 없다. 또 신앙을 지성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별로 은혜가 되는 것 같지도 않다. 아무리 가톨릭교회가 종이 교황을 믿는다고 비판해도 그리스도교회 성도들은 여전히 성경말씀 전체에 목숨을 걸고 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성경 한 절에 생명을 걸어야 한다. 그냥 한 구절만 딱 따내서 그것에 목숨을 걸면 이단이 되기 쉽다. 그래서 ‘성경 전체를 품고 있는 한 구절’에 목숨을 걸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에 목숨을 거셨다.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라”(욥 1:21)에,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다”(스 4:16)에, 베드로는, “내 양을 먹이라”(요 21:17)에,  바울은,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에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필자는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에 목숨을 걸었다. 처음 예수 믿을 때 나의 심장 깊이 심어 주신 말씀이다. 그때 어린 마음에 큰 결단을 했다. 무엇을 하든지 알곡이 되겠노라는 차돌 같은 결심이었다. 알곡에는 알이 있고 쭉정이에는 알이 없다는 것(요일 5:12)과, 예수님처럼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요 12:24)이 되어야 한다는 것도 후일에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신앙생활 65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 "그래 네가 정말 알곡이 되었느냐" 하는 주님의 책망을 자주 듣는다. 아직 주님께서 흡족하실 수준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비록 쭉정이라 해도 그분의 ‘생명 알’로 조금씩 조금씩 더 채워져 가고 있는 ‘알곡 지향적 쭉정이’가 되려 한다. ‘완전 지향적 죄인’이란 뜻이다(마 5:48).

(대표 저서: 목회자의 최고표준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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