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녀의 정체성의 가장 큰 특징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개인들이 모여 '우리'가 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란 더도 덜도 아닌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정체성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지만, 현실적으로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머리와 입으로는 우리가 형제자매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렇게 부르기도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한 가족이요,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일상생활이나 현실 속에서 보거나 느끼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사실을 보고도 교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단호합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면 아무도 우리 모두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29-30).

현대인의 관점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에 의해 정리된 말씀입니다. 복음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어 있고, “핍박을 겸하여 받고”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으며, 특히 금세와 내세라는 양쪽 세상이 다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는 현실적인 과제요 약속이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이런 뜻입니다. ‘진실하게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나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리는 사람치고 백배로 되돌려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도 지금 이 순간에 이미 집들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들과 자녀와 토지를 받습니다.’

오늘날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들의 비중은 절대적이었습니다. 형제자매, 부모, 자녀, 토지, 이 모든 것들은 존재 이유이자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모든 것을 상대화시키고 있습니다. 혈족, 부모, 자녀, 토지 모두 버릴 수 있는 것들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버릴 필요가 있는 것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덮어놓고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금욕을 강요하거나 무소유를 실천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바야흐로 새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 때문에 기존의 것들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말입니다. 옛 것에 얽매이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옛 가족을 버렸는데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새로운 가정에 역설적으로 다시 형제자매와 어머니들과 자녀들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의해서 보아야 할 사실 가운데 하나는 버리는 것과 돌려받는 것 사이에 없어진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무엇을 되돌려 받지 못합니까? 아비입니다. 버리는 목록에는 있는데 되돌려 받는 목록에는 없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돌려받는데 아버지를 돌려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새 가정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공동체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지금 이 순간에 제자들은 자기들이 버린 모든 것을 백배로 되돌려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말씀하고 계시며, 나중에는 제자들의 체험이 되었습니다. 가정을 버렸는데, 제자공동체 안에서 수많은 새 형제자매를 발견한 것입니다. 양친의 집을 버렸는데, 이 땅 곳곳에서 반갑게 맞이해 주는 수많은 새 어머니들을 발견한 것입니다. 자녀를 버렸는데, 새로운 일로 가슴 벅차 있는 새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든 것입니다. 토지를 버렸는데,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튼튼하고 보람찬 공동체를 '새 땅'으로 얻은 것입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이 사실을 마가복음 3장에서 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 있는데, 하도 많은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밥을 먹을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20).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와서 예수님을 붙들어 억지로 집으로 데려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의 공개 활동 때문에 화가 나 있었습니다. 심지어 집안사람 중에는 예수가 정신 나갔다고 확신하는 친척이 있었습니다(21). 그런데 예수님은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는다는 말을 듣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34-35).

여기서 새 가정이라는 주제가 다시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고도로 수사적이며 법적이기도 한 고대의 말투로 자기 가족으로부터의 해체를 선언하고, 스스로 다른 가족에 편입됩니다. 즉석에서 다른 가족을 구성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모친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새 가족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은 다가온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믿고 하나님 백성으로 모이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형제자매라는 새 가족이 제자공동체로 탄생하게 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편입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는 이들이 있는 곳마다 새로운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땅 위에 복음의 불을 놓아 모두가 타오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안에서 결별과 양분을 낳게 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이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눅 12:51-53).

분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정들이 나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곳곳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결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어서 자기 가족, 자기 혈족과의 갈등이라는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의 오랜 가족과 씨족들을 꿰뚫으며 곳곳에서 예수님의 새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핵심

이 사실은 복음의 핵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자기 가족을 떠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물론 온 식구가 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않는다면 심각한 결렬을 경험하게 됩니다. 혈연으로 이어졌던 가족 간에 분쟁이 일어납니다. 어찌 보면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기독교는 분명 가정의 해체를 전제로 하고 있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적당한 선에서 원하는 것만큼 양보하고 좋은 것들을 취사선택해서 받아들이는 신앙생활을 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팔아 밭을 사지 않으면 천국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단호합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렇게 단호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그저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적당히 믿으려 합니다. 그러나 불가능합니다. 말 그대로 가정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안에서 예수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 소수만이 고향을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팔레스타인 지역을 두루 다니며 정처 없는 편력 생활을 했습니다. 대다수는 가정에 머물렀지만,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가정 역시 달라졌습니다. 더 솔선수범하고 더 개방적인 가정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혈연으로 이루어진 친족끼리만 유유상종하지 않습니다. 기꺼이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환대합니다. 가정들 서로가 관계를 맺습니다. 이전의 혈연으로 연결된 가정보다 훨씬 더 강한 유대감을 가진 확장된 가정들의 연합체가 되었습니다.

아니면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납니다. 가정들이 분열됩니다.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갈라집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과 예수의 운동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믿음이 믿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징표가 됩니다. 자기 가족으로부터 배척당한 수많은 개인이 옛 형식들과 결별을 고하고 새 가정과 결합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분쟁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한가운데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새 사회가, 새 가정이 아직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더라도 실제로 막을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생겨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을 새로운 가정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바라보며 그것이 주님의 복음에 의해 주어진 새로운 가정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는 여전히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정만을 중요시 하고 그 가정을 우선시합니다. 심지어 가정사역이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로 가정은 하나님보다 귀중한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의 목표가 결국 가정이 평안하고 집안 식구들 다 잘 살자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복음과 상반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리로부터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이미 도래했다고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는 어디로 간 것입니까? 옛 이스라엘에 일어났던 분열을 보고 그것이 두려워 기독교가 복음을 버린 것입니까?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가정이 중요합니다. 가족이 중요합니다. 재산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음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무서운 선택을 요구합니다. 성경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것입니다. 가정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가족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가정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정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속에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는 새로운 가정이 될 것입니다. 완전히 달라진 새 가정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그리스도인 형제자매들을 받아들이는 가정이 되어 서로가 유무상통하는 공동체, 확대된 가정과 같은 예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

복음은 전혀 달라진 가정,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도 개방되어 확대된 대가족 제도와 같은 공동체를 통해 진정한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무상통하는 가정들이 모여 이루어진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공동체를 통해 드러납니다. 주님의 말씀 또한 공동체가 아니면 실천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추종자들을 모아 공동체를 만들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별 위협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끔 지혜로운 말을 던지면서 떠도는 기인 정도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으며,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공동체의 삶을 나누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아니면 그분이 말씀하시는 모든 것들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분은 회개를 통해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서, 영적, 정서적, 경제적 상호의존이라는 특징을 갖는 제자들의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혈연으로 이어진 가정이라고 해도 부족한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주어진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샬롬'의 공동체입니다. 부족이나 결핍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 아픈 사람도 있고 죽는 사람도 있고 고난을 겪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보살핌과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어떠한 잘못도 용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극복되므로 궁극적으로는 부족한 것 없는 샬롬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공동체 자체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말로만 형제자매라고 할 뿐 실제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형제자매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이루어야 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공동체성을 상실하고 가족 됨의 의미를 잃어버림으로써 복음 자체가 변질되었습니다. 교회 어느 구석에서도 가족이라는 느낌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마음에 안 들면 떠나 버리는 그런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서로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라는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정체성을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진정한 교회

교회가 진정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라면 우리는 교회를 함부로 선택할 수도 떠날 수도 없습니다. 가족이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교회, 나쁜 교회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가족은 좋아도 나빠도 내 가족입니다. 더구나 교회 간의 경쟁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족 사이의 경쟁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가족이 되는 것을 포기하거나 다른 식구를 제명시킬 수 없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 모두의 아버지는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누구도 버리시는 일이 없습니다.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 자비로운 아버지이십니다.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갈라설 수 없습니다. 능력이 없다고 쫓아낼 수 없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능력 없고 약한 형제나 자매가 가족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가장 먼저 돌보고 사랑해야 할 우리의 식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에겐 약함이나 부족함도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는 희생과 섬김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 수산나는 열아홉 명의 자녀를 낳아 그중 열다섯 명을 훌륭하게 길러낸 의지의 어머니입니다. 그 중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습니다. "아픈 자식이 나을 때까지는 그 자식을, 집 나간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는 또 그 자식을 나는 더 사랑합니다." 아무리 부족한 점이 있어도 그것이 전혀 문제 되지 않는 곳, 약하고 방황하는 자식이 오히려 더 많은 관심을 받고 가족 전체를 단단하게 결속시켜 주는 그곳이 바로 가족입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로 기도하면서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나님을 부를 때 우리 모두가 한 가족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한 가족으로서 우리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초대교회에서는 말로만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귀족도 있었습니다. 노예도 있었습니다. 도저히 형제자매가 될 수 없는 벽이 그들 사이에 가로막혀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종도 형제요, 주인도 형제였습니다. 모든 차별과 장벽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그들의 정체성 앞에서 철폐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오네시모라는 도망친 노예를 만났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이 알고 있던 빌레몬이라는 사람의 노예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를 써서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으라고 말합니다. 당시의 관습으로 도망친 노예는 잡히면 사형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추호의 망설임 없이 빌레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난 곧 사랑하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몬 1:16).

주님의 기도를 실천했던 초대교회 공동체는 한 가족처럼 매일 모이기를 힘쓰고 떡을 떼며 식사를 같이 하였습니다.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었습니다. 그들이 한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도할 때 사용하는 '우리'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의미에서 '우리'가 되었습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사용하였습니다. 아무도 불평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가족은 그런 것입니다. 아버지가 일해서 번 돈을 자녀들이 다 써도 아버지는 오히려 부족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 일들이 초대교회에서는 일상이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복음의 통로였습니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공동체 일원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새롭게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들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든 다른 사람과 경쟁하여 이겨야 하는 세상 속에서 서로 사랑하며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들의 모습에 감동했습니다. 처음 다가오는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그들의 삶을 통해 진리가 주는 평안과 기쁨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기꺼이 그들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선교 또한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우리'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의 응답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희생하고, 섬기면서 그들 스스로 가장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이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지켜 줍니다. 그러한 삶 자체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감동하여 그들에게 다가와 문을 두드립니다. 그런 그들에게도 기꺼이 자신들이 나누고 있던 사랑을 나눠 줌으로써 그들은 또 다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자기만의 교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 또한 한 가족입니다. 다른 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움에 처하면 금식을 해서라도 그들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들에게 시간과 거리는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부르심을 받은 그 정체성 안에서 그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사회적 장벽을 넘고 신분을 타파하고, 국경과 민족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를 한 가족으로 품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 됨입니다. 절대로 배타적인 공동체가 될 수 없는 공동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명령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주님의 명령은 끊임없이 이웃을 향해 나아가 마침내 세상 모든 민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으로 한 형제자매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날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임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는 날마다 '나'라는 경계를 포함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경계를 허물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 백성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재건하는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법이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오직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우리'가 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가족, 하나님 백성 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거기에 머물러 '나'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반쪽짜리 신앙인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사랑하고 양보해도 끝없이 요구하는 이기적인 존재이며 자신밖에 모르는 영적인 장애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가 아닌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가 사랑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이겨내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리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희망을 주는 새로운 사회,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사랑의 공동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하나님 나라, 그것이 우리가 꿈꾸며 나아가고 있는 현실이며 미래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