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열전(15)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아브라함의 마지막을 대한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가나안 땅에 정착한 지 정확히 100년이 지난 시점이다. 창세기 본문은 아내 사라의 죽음(23장)과 이삭의 결혼 기사(24장)를 통해 아브라함의 시대가 지나가고 이삭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이미 확인했다. 이제 아브라함의 죽음 기사와 몇몇 추가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먼저, 아브라함이 후처 그두라를 취하여 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음을 알려 준다. 물론 창세기 본문이 시간적 흐름을 따른다고 볼 필요는 없다. 그두라에 대한 언급이 사라의 죽음 이후에 나오는데, 사라가 죽은 후에 그두라를 취하여 여섯 아들을 낳았다고 할 경우, 전체 흐름에 중요한 문제가 생긴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어 아들을 낳은 것이 기적적인 일이었다고 볼 때, 아브라함이 137세가 넘어 재혼하고 아들들을 낳았다고 하면, 이는 이삭의 출생의 독특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 온다. 그러므로 그두라를 취한 것은 이삭이 태어나기 전의 어느 시점일 가능성이 높다. 하갈을 통해 태어난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임을 감안한다면, 그두라를 통한 자녀 출산은 이스마엘 출생 후부터 이삭 출생 전까지, 즉 아브라함 나이 86세부터 99세까지의 일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그두라와 여섯 아들을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시간적 순서를 따라 이야기의 앞부분에 언급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씨인 이삭의 출생에 초점을 맞출 수 없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언급을 미루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 다양한 민족이 등장했음을 알림으로써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겠다던 하나님의 약속이 실질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두라에게서 낳은 여섯 아들 중에는 미디안도 포함되어 있다. 미디안이 특별히 언급된 것은 모세 당시 미디안 사람과의 관련성 때문일 것이다. 모세의 장인은 미디안 사람이었으며, 출애굽기에서 그는 입술로 하나님을 고백한 최초의 이방인으로 인정된다.

그두라의 자식들이 아브라함의 아들로 인정받았어도, 그들은 이삭과 같이 약속을 받은 후손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재산을 주어 분가시켰다. 이삭은 아버지의 모든 소유를 상속받았으나, 다른 자녀들은 재산만 받았을 뿐이며, 약속의 땅을 떠나서 살도록 했다 (고대 법률은 첩의 자식들에게 본처의 자식들과 동등한 상속을 할 수 없게 했으며, 다만 아버지가 자발적으로 재산을 나눠줄 수 있도록 했다). 이로써 아브라함은 자신의 사후 혹시라도 있을 자녀들 간의 분쟁을 미리 예방했다.

아브라함의 죽음은 비교적 간단하게 언급된다. 그가 175세에 죽었으니 실제로는 이삭과 리브가를 통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난 이후 15년을 더 살았겠지만, 11장에서 시작된 데라의 족보를 마감하기 위해 먼저 그의 죽음을 언급한다. 아브라함이 죽자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막벨라 굴에 장사했다. 막벨라 굴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셨음에 대한 아브라함의 굳은 믿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며, 이후 족장들이 함께 묻힐 곳이기도 했다.

아브라함이 걸어왔던 믿음의 길을 이제 아들 이삭이 걸어가게 될 것이다. 본문 11절은 아브라함의 죽음 이후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고 언급함으로써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이 이삭에게 이어짐을 명확히 한다. 이는 26장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말씀을 새롭게 하셨다(창 26:3-5). 약속을 소망하고 믿음의 길을 걸었던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온전한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세대를 넘어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게 지켜질 것임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순간 만큼 중요한 사건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즉각적으로 순종했고, 비록 연약함으로 실패하는 순간들도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약속을 붙잡고 믿음의 길을 걸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노아를 통해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 오셨던 것처럼, 아브라함을 통해 온 땅의 인류로부터 하나님의 구속 백성인 이스라엘을 창조하셨다. 아브라함을 통해 “여자의 후손”은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 로마서 4장 16절에선 기꺼이 그를 우리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불리기를 기뻐하셨다고 언급한다. 열국의 아비가 될 것이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날 너무나 명백하게 성취되었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인정하는 민족들은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넘어, 그를 영적 아버지요 믿음의 조상으로 모시는 기독교에까지 이른다.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신앙 여정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모델이다. 특히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 인간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날마다 변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하다.

아브라함의 삶을 볼 때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는 당신의 뜻과 계획을 온전히 밝히지 않으셨나? 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처음부터 사라를 통해 자녀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면, 25년만 기다리면 된다고 하셨으면, 아마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믿음 생활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보여 주시면 우리가 순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대단히 순진한 생각이다. 하나님의 계획이 다 드러나면,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무게로 다가올 수도 있다.

현재의 우리 모습만 보더라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시면 순종하겠노라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있지만, 사실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정말 진실하게 순종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몰라서가 아니다!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현재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잘 감당하는 삶을 살 때,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나 순종하는 현재를 살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바로 이런 믿음의 진수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때로는 실패하겠지만, 어차피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신실함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신실함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 편집자 주 : 강화구 목사님의 아브라함 열전은 이번 호로 끝을 맺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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