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말이 정당성과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 말의 내용이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특정한 시대와 상황 속에서만 맞는 말이라면 진리라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진리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즉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말하는 이의 자격과 목적이 그 진리의 가치와 힘에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만약 간음하다가 잡힌 여인이 이 말을 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요? 예수님이 그 여인을 용서하셔서 그렇지 여인은 분명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사회적 비난과 종교적 징계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비난 받을 만한 행동을 한 여인이 자신을 책망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다면, 그 말은 듣는 이들의 분노만 자극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인에게서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서 남아 있던 관용의 마음을 거두었을 것이고, 더 빨리 그리고 더 세게 돌을 던졌을 것입니다.

한편 현장의 구경꾼들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면, 요즘 말로 물타기하는 게 아니냐는 반론이 나오지 않았을까요? 양비론 속에 자신을 숨기는 기회주의자들이라는 비난을 받거나, 초점을 흐리지 말라는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속의 군중들은 예수님의 그 말에 감정을 가라앉히고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돌을 내려놓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진리가 그 말에 담겨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말씀을 하신 예수라는 존재가 가진 영적, 인격적 완전함과 목적의 순수성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메신저가 메시지였으니까요.

당혹감과 수치심, 분노와 아픔을 느끼게 하는 뉴스들이 미국과 한국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른바 미투 운동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피해자들이 설명하는 당시의 상황들과 그때의 감정들, 가해자라고 지목된 이들의 변명 속에 드러나는 가치관과 행동 습관들을 보노라면 얼굴이 화끈거리고 맷돌이 마음을 짓누릅니다. 이는 단지 성 문제에 관한 것만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권위와 권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고, 입장에 따라 권력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지를 숙고해 봅니다.

행동이었느냐 마음이었느냐, 방조자였느냐 주범이었느냐의 차이일 뿐, 그곳에 내 모습이 있고, 아버지 세대의 모습이 있고, 친구들의 모습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보이는 나는 가해자이기도 하고 때론 피해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이 분명 계시니까요.

이런 상황 속에서 “죄없는 사람 나와 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초점을 흐리는 것이요, 내면에서 들리는 반성의 목소리를 입막음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지 않은 삶을 사신 분들을 모욕할 수는 없습니다.

진심으로 고백하고 싶은 말은 우리 모두, 아니 ‘나’역시 그런 문화의 공범자였다는 것입니다. 나는 “죄없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돌을 들 수 없습니다.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돌을 맞아야 할 사람입니다. 세상이 달라져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문제였던 것에 눈 감고 세상에 젖어 살았던 제 모습이 문제였습니다.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을 오용하지 않겠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씀을 아전인수격으로 남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보다는“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습관과 마음과 영혼에 깊이 새겨봅니다.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