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산책(4)

도스토옙스키, 작가 자신의 분신이기도 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화자는 본문 중에서 알료샤가 이 소설의 주인공임을 분명하게 밝힌 적이 있다. 그렇다면 알료샤가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가를  살펴보는 건 이 작품의 핵심을 이해하는 기초 작업이 될 것이며, 또한 범박하게 알료샤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파뿌리 이야기에 있다고 하겠다.

돈 많은 아버지 표도르와 젊고 매력적인 그의 장남 드미트리, 둘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던, 세속적 욕망에 가득찬 그루센카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알료샤를 만난 후 새로운 영적 세계에 눈을 뜬다.  그녀는 유년기의 순수함을 잠시 회복한 듯, 자신이 어렸을 때 유모에게서 들었던 파 뿌리 이야기를 알료샤에게 들려 준다.

지독하게 욕심만 부리며 살았던 한 할머니가 죽어 지옥에 갔는데 할머니의 수호천사는 생전에 할머니가 파 한 뿌리를 누군가에게 적선한 것을 기억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 적선행위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파  한 뿌리에 매달려 지옥을 벗어나라 명했다. 그리하여 할머니는 거기에 매달려 지옥을 벗어나고 있는데 함께  지옥에 있던 자들이 그 파 뿌리에 같이 매달려 탈출하려 하자, 할머니가 이건 내 파 뿌리라고 하면서 발로 걷어차서 결국 할머니는 그들과 함께 다시 지옥불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 짤막한 서사는 믿음과 구원, 행위의 삼각구도에서 다소 의문점을 낳기도 하지만 이 서사가 알료샤의 스승, 조시마 장로와 연계할 때, 파 한 뿌리는  피 한 방울로 변주되면서, 구원의 조건이라는 의미심장한 상징으로 발전한다는 것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조시마 장로가 죽고 나서 알료샤는 꿈 속에서 천국에 가 있는 그를 만나는데, 그토록 수많은 선행을 베푼 성자와 같았던  조시마 장로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천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파 뿌리 하나에 의한 것이라고 고백한다. 사실 파 한 뿌리는 구원에 이를 만한 조건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결여일 수밖에 없는 이 조건이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은  충족 조건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이는 곧 십자가의 공식으로 이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호에 다룬 이반의 대심문관 이야기가 현실의 모순을 타개할 능력자의 서사를 논리적으로 전개한 것이라면, 알료샤의 파 한 뿌리 이야기는 천국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곧 결여의 방식이 내던진 사랑의 공식에 의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외에 알료샤를 떠올릴 때 빠뜨릴 수 없는 건 일류샤 이야기일 것이다. 일류샤 이야기는 4편 7장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알료샤의 큰 형인 드미트리가 술에 취해 한 퇴역 대위의 턱수염을 붙잡고 광장으로 끌고나가 망신을 주고 있는데, 마침 그  대위의 아들인 일류샤가 학교 친구들과 우연히 그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일류샤는 드미트리에게 가서 아버지를  제발 용서해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드리트리는 계속 턱수염을 조롱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일류샤의 친구들은 “너희 아버진 수세미를 잡혀 광장 한복판에서 질질 끌려 다녔지.”라고 조롱하며 일류샤를 놀렸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모욕을 당한 남자는 가해자에게 결투를 신청하여 명예를 회복하곤 했다.  퇴역 대위도  결투를 하고 싶었지만 만약  자기가 결투하다가 죽게 되면 남은 가족을 누가 먹여 살리나 하는 문제로 고민하다가 결투 신청을 못하고 묵묵히 그 모욕을 감내하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일류샤는 드미트리의 동생인 알료샤가 지나가는 것을 발견하고 그의 팔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 달아나는 것으로 어린애다운 보복을 했던 것이다.

일류샤가 자기에게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알게 된 알료샤는 그들이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임을 알고 드미트리의 약혼녀인 카테리나가 전해 준 돈 200루블을 들고 그 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퇴역 대위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괴이한 눈초리로 알료샤를 쏘아보더니 두 장의 지폐를 힘껏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자부심에 넘쳐서 외쳤다.

“이 수세미는 더러운 돈 몇 푼으로 자기의 명예를 팔아 넘기지 않는다고요!” 그의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되었고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그런 모욕의 대가로 당신들한테서 돈을 받는다면 집에 있는 제 아들에게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알료샤는 그 말을 듣고 묵묵히  돌아온다. 그 후 카테리나가 왜 돈을 전해 주지 않고 그냥 들고 왔냐고 묻자 알료샤는 그 이유를 차근차근 들려준다.

그 퇴역 대위는 그 돈을 보기가 무섭게 자존심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심지어 진심으로 알료샤를 껴안으려고 하는 자신을 보고,  스스로 굴욕감을 느끼고 화가 나서 그 돈을 뿌리쳤다고 했다. 자존심 때문에 돈을 짓밟아놓긴 했지만,  그 돈이 어떤 돈인데, 돈을 받지 않은 자신의 자존심을 원망하면서 오늘 밤엔 꿈 속에서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될 거라고 했다. 그러니 내일 아침 쯤 그 돈을 갖다주면 지난 날 돈을 뿌리친 적 있으니 자존심은 자존심대로 회복하고 또 하루를 지나면서 가난에 대한 현실감이 돌아왔으니  돈은 돈대로 받게 될 거라는 설명이었다.

실제로 남을 도울 때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자존감을  손상시키지 않고 돕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남을 배려하는 깊은 깨달음과 순발력 있는 지혜로운 행동. ‘성스러운 바보 (holy fool)’ 알료샤,  ‘유로지브이‘의  행보.  결국 작가가 제시하고자 했던 건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천적 기독교적 휴머니즘은 아니었을까. 여기서 이반이 알료샤에게 들려 주었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싶다.

“알료샤, 나는 살고 싶어, 논리를 거역해서라도 살고 싶어. 내가 비록 사물의 질서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봄이면 싹을 틔우는 끈적끈적한 잎사귀들이 소중하고, 파란 하늘도 소중하고, 때로는 아무런 이유 없이 좋아지는 그런 사람들이 내게는 너무 소중해.”

어제는 봄을 기다리는 설레임을 무너뜨리려는 듯  시카고에 난데없는 눈비가 휘몰아치며 내렸다. 맹렬한 추위가 온 거리를 뒤덮었다. 봄과 겨울의 사잇길로 러시아의 두터운 외투를 걸친 도스토옙스키의 검은 그림자가 힐끗 스쳐 지나는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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