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도를 도라고 하면 이미 영원한 도가 아니다."라는 노자의 글이 있습니다. '도'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제 이름이 아닌 것이 바로 '도'입니다. 이는 '도' 그 자체의 직접적 의미가 언어적 의미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분이라 착각하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도'와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을 제한하고 인간의 지식에 하나님을 가두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그것을 신학적 용어로 초월적이시면서 내재적이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주기도의 세 번째 단어 "하늘에 계신"은 그러한 하나님을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그러나 엄위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경험해야 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경솔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감지할 뿐입니다. 하늘이란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만져도 만져지지 않지만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내재적이시고 초월적이신 하나님

우리가 기도하는 분은 '우리 아버지'이시면서 동시에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양면성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처럼 자상하시고 우리가 간구하기 전에 우리가 원하는 바와 필요한 것들을 미리 아시는 분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높은 하늘에 계신, 지극히 크고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기도의 생명은 친밀함과 긴장감의 긴장 상태를 여하히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친밀하신 분이기에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까지 담대히 나아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그분은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분이기에 경외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친밀함이 강조되면 신앙생활이 경박해지기 쉽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초월성이 너무 강조되면 율법적이 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형식적인 신앙이 되어 역동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하늘은 가장 위대하고, 거룩하고, 엄위한 대상에 대한 경외심을 담은 표현입니다. 너무도 장엄해서 어디에도 담을 수 없는 그 무한함을 하늘이라는 추상성을 이용해 담아낸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처음에는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분으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등으로 불렀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포로기 이후의 역사서인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선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열두 번 사용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면서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달라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하나님의 선민인 그들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사고로 이스라엘의 멸망은 곧 하나님의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라 간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 의해 남쪽 유다가 멸망하면서 성전에 있던 모든 기물들이 바벨론 신전으로 옮겨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 마루둑에게 무릎 꿇은 것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신학적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만군의 여호와이신 하나님께서 다른 신의 신전에 포로로 잡혀갈 수 있는가?

그러한 신학적 고민은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좁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하나님 이해에 대한 지평의 확대를 가져왔습니다. 그러한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을 '하늘의 하나님'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좁은 이스라엘 땅에만 존재하거나 갇혀 있는 분이 아니라 전 세계와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그들의 사고와 인식 변화를 반영한 호칭입니다.

그들의 사고에 의하면, 하늘은 높고 감히 어느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사용한 하늘이라는 단어는 단수가 아니고 복수였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장엄복수'라고 합니다. 너무나 장엄해서 복수로 표현한 단어가 바로 하늘이라는 단어였습니다. 또 한편으로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그들에게 편리하고 유익한 단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된 곳에서 하늘을 쳐다보던 그들의 습관이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에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와서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표현이 일반화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극존칭으로서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한 바른 이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나라를 우리는 하나님 나라, 혹은 천국 곧 하늘나라라고 부릅니다. 천국이라는 표현이 주로 사용된 곳은 사복음서 가운데 마태복음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 쓰인 복음서입니다. 유대인들의 사고에 맞도록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라는 말에서 하늘은 단순히 그분이 계신 곳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왕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를 의미하듯이, 하늘나라 또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천국이라는 개념이 왜곡되어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천국을 장소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천국을 죽어서 가는 나라로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는 예수님의 선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지금 이곳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통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적당히 살다가 죽은 후 천국 가면 되는 신앙으로 왜곡되어 버렸습니다. 기복신앙을 추구하는 것도 천국의 현재적 개념을 망각했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도래했고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는 것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가난한 자의 삶을 살아야 하고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맞도록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순간 이미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이미 천국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에 대한 바른 이해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180도 바꾸어 놓습니다.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며 이 땅에서의 삶이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방식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작은 노력 하나하나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이루는 일에 사용된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한 순간도 그대로 땅에 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 하늘나라를 지금 이 땅에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너무 작아지신 하나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인식은 현저하게 줄어 있거나 결여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힘 없고 변화 없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현대인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하나님의 신적 위엄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라는 어느 책 제목은 우리 시대에 매우 적절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믿음의 선조들과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지만, 우리의 고백은 과거의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과는 사뭇 달라진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교리 또한 과거와 같지만 예전처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엄위하심에 대해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격적이라는 사상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본래의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격체로서의 하나님 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면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고, 열심히 기도 안하면 안 들어 주시고, 성의를 다하면 감동하시고, 성의가 부족하면 분노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만 편애하시고 우리의 반응에 따라 춤추시는 그런 하나님으로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삶은 유한합니다. 우리의 삶은 공간과 시간, 지식과 권능 등 모든 면에서 제한을 받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영원하시고 무한하시며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수중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지만 우리와 달리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성경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 그들에게 보여 주시는 관대함과 애정, 동정과 오래 참으심과 긍휼히 여기심에 대해 강조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위엄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그분의 무한하시고 절대적인 통치를 결코 잊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격적이시면서 엄위하신 하나님에 대해 언급합니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께서 비인격적인 우주적 원리가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며 활동하고, 선을 기뻐하시고 악을 미워하시며, 피조물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살아계신 인격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도록 우리를 이끄는 한편,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건들만 통괄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어떻게 하면 위대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에 대해 올바른 지식과 이해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질문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믿음은 피상적이거나 입술만의 고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단계로 이 질문에 접근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서 하나님을 작게 만드는 제한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위대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적 이해

1) 전능하시고 편재하시는 하나님
시편 139편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임재와 지식과 무한하고 무제한적인 능력에 대해 묵상합니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기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5-10).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11-12). 우리를 인간의 시야에서 감추어 주는 흑암이라도 하나님의 시선을 가려 주지 못합니다.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오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1-4). 하나님의 지식에는 한계가 없다는 시편 기자의 고백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행동과 동작을 아십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습관, 계획, 목표, 바람을 다 아시고 입 밖으로 내지 않은 말과 마음속의 묵상까지 다 아십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마음과 과거와 미래의 계획을 숨길 수 있지만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아십니다. 실로 그분은 우리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십니다. 인생의 매순간을 전지하시고 편재하신 창조주와 함께 보낸다는 것을 인식할 때 우리의 삶은 그분의 뜻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분을 경외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14). 만물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은 또한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분이 만들어 주신 육체의 정교함으로 이미 우리에게 계시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지혜, 임재 그리고 그분의 능력이 얼마나 무한하신가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

2) 비교하고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이해하는 두 번째 단계는 우리가 위대하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 즉 권세들이나 힘들과 하나님을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에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사 40:12). 하나님께서 당신이 행한 과업들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만 그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사야 선지자는 열방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에게 열방은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그 앞에서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느니라"(15,17). 거대한 나라들의 권세를 보라는 것입니다. 앗수르, 애굽, 바벨론 등이 그러한 나라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나라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의 군대들과 자원들은 이스라엘과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힘과 권세가 한 방울의 물 같다는 것입니다. 없는 것같이 여기시고 빈 것같이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방보다 크신 분이시므로 그들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는 땅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의 거민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같이 펴셨으며 거할 천막같이 베푸셨고"(22). 선지자는 우리의 시선을 세상으로 향하게 합니다. 세상의 크기와 다양성과 복잡성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구 전체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하잘것없는 존재입니까? 그러나 거대한 지구도 하나님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작아 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을 작아 보이게 만드는 분이십니다. 세계는 하나님의 발판입니다.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3) 위대한 자를 보라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25). 그 다음으로 세상의 위대한 자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통치자들, 지배자들. 권력을 지닌 사람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위대한 자들보다 더 위대하신 분입니다. 그 모든 이들을 이끌어 가시고 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눈을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26). 오늘날 우주에 관해 알려진 것을 보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규모가 얼마나 크고 거기에 담겨 있는 것들이 얼마나 오묘한지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주는 오묘하고 신묘막측합니다. 그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유지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창조주이시며 그것들의 주님이십니다.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합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엄위하심은 그러한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기며 나로 그와 동등이 되게 하겠느냐?"(25) 이 질문으로 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꾸짖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너무 인간적이요." 루터의 지적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충분히 크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의 실재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습니다.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께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27)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을 베푸셨던 어느 누구도 버리지 않으시며,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 또한 그의 양을 절대로 놓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상태와 필요를 잊어 버리셨다거나 간과하신다거나, 흥미를 잃어버렸다고 비난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대하는 올바른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떠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28-31).

이것이 엄위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들의 삶에 대한 결론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가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여호와로부터 얻는 힘, 그것이 없다면 형편이 나아지고 높은 자리에 오른다고 하여도 우리의 삶은 피곤하여 넘어지고 자빠질 뿐입니다.

신앙이란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엄위하시고 거룩하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삶의 방식이며, 오직 그것만이 인생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길임을 명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참된 하나님 백성의 삶입니다. 그분은 내 속에 거하실 만큼 친밀한 분이시지만 그분은 모든 곳 너머에 계시는 초월적인 존재이십니다. 내재와 초월의 긴장감 사이에서 쉽게 말해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사랑하면서도 존경심을 잃지 않는 절제된 삶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위대하시고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에 감사하면서도 그분에 대한 존경심을 잊지 않으며 긴장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그분의 호칭 앞에 붙은 수식어를 입으로 말할 때마다 높고 엄위하신 그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 하늘이라는 상징을 사용해야 했던 하나님 백성의 묵상의 결과를 우리 또한 깊이 묵상하고 느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 사랑이 존경이 될 때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의 삶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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