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이처럼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하지 않으실 것만 같던 시간이 현재 우리 삶 속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식으로 일이 진행될지 전혀 알지 못한다." 성경의 새 번역본 『메시지』를 출간한 유진 피터슨 목사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침묵을 말하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하나님,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한시적이 아니라 영원히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연약한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그 어려운 시간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을 경험하는 그 시간에 방황하거나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유진 피터슨 목사는 그런 말을 하면서도 왜 신앙을 버리지 않는 것일까요?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런 말을 덧붙이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죽음과 고통, 두려움과 결핍으로부터 반드시 구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통과해야 할 시험과 관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고, 홀로 몸부림치는 고독의 시간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통과할 때,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고 믿음의 진위가 가려집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과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는 사람의 믿음이 갈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은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완전히 알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지만 흙으로 빚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흙으로 빚어진 존재가 아니십니다. 우리는 시공에 얽매이지만 그분은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러한 존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그분을 경외하고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그분이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그분께 맡겨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새 땅에서 부활의 몸을 가지고 그분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위대한 소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분은 위대하고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것이 주기도에서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긴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타나실 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중 모든 백성이 다 떠니라" (출 19:16). 하나님께서 아직 나타나시지도 않았는데 드러난 징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시내 산에서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점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매" (18).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부르심을 받았고 그분의 지시에 따라 행했던 모세조차 하나님을 똑바로 볼 수 없었습니다. 타락하여 죄에 오염된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3장과 34장에는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청하였습니다. "원컨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33:18) 하니, 여호와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20). 인간은 하나님을 똑바로 볼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두시고 손으로 모세를 덮어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등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등을 본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했습니다. 그의 얼굴에 여호와의 영광의 광채가 비친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 앞에 나아갈 때에는 수건을 벗고 이스라엘 백성을 만날 때에는 다시 수건을 썼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은 놀랍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경외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사야서 6장에는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의 입에서 이런 말이 터져 나왔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사 6:5).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자 인간의 더러움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자 스랍이 나타나 화저로 단에서 취한 뜨거운 숯을 가져다 이사야의 입에 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의 죄가 제하여졌고, 죄가 사해진 후에야 하나님을 대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란 우리의 마음이 지성소가 되어 하나님을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보게 되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구약시대처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은혜의 보좌란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위쪽 부분의 속죄소를 의미합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두꺼운 휘장이 있었습니다. 두께가 5센티미터가 넘는 그 휘장은 질기고 견고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성소의 그 휘장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장애물이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담대하게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 결코 값없는 은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십자가 형틀의 죽음을 대가로 지불하심으로써 하나님과 대면하는 일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변화이며 감사한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 은혜를 누리기 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성소에 대해 느꼈던 두려움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를 이해해야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결코 값싼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통해 다시 한 번 깨닫기를 바랍니다.

인간의 지식은 짧고 그 수명은 찰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이 위대한 존재로 영원히 사는 것인 양 착각합니다. 자신의 짧은 지식을 잣대로 세상과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하나님까지도 자기의 생각 속에 가두려고 합니다. 하나님까지 자신의 생각으로 이해하려 듭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헛된 시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아는 것이 없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무언가 할 수 있다고 큰소리치던 마음이 변하고 마침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이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요한 대화 중 하나이며, 존재의 거대한 차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 크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대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9)는 말씀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상상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짧은 소견으로는 불합리해 보이고 때론 억울하게 느껴지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거나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만이 온전히 선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면서 신앙의 대상이시며 예배의 주인공이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기는 고난의 복음이 아니라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해설서입니다. 억울함을 호소하던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신 하나님 앞에서 욥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여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 42:1-6).

욥의 고백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무슨 일을 계획하시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과 둘째,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스스로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마치 아는 것처럼 착각하는 인간은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인간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얻을 수 있습니다. 욥은 고난 받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듣지 못했지만, 인간의 무지와 유한성을 인정하고 고난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안에서 마침내 자유를 얻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계시된 만큼 하나님을 압니다. 그 이상의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계시된 하나님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여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계시된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진정한 하나님이실 수 없으며, 소위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님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교리 안에 가두려고 하는데, 교리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만을 신뢰하기 때문에 기적을 추구합니다. 기적을 추구하는 신앙 역시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계몽주의 시대에 들어 인간의 이성이 강조되면서 하나님은 무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계몽주의 시대에는 인간 이성을 중시하면서도 추구하는 진리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기 현대에 이르러 인간 수만큼 진리가 횡행하는 어지러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성을 활용하여 창의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만, 이성이 하나님을 넘어설 때 이성은 신앙의 도구가 아니라 사단의 도구가 됩니다.

이성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닌 것이 우리 중심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반드시 썩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영원하십니다. 하나님 이외의 절대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뜨인 돌'과 같습니다. 그분은 우상들과 우상이 된 인간의 이념과 어리석은 생각들을 모조리 부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땅에 있는 것은 그것이 물질이든, 이념이든, 이데올로기든, 체제이든, 다른 무엇이든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은 그분의 뜻에 복종해야 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자녀들이 가져야 하는 기도의 자세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는 내 뜻을 아뢰고 그분의 반응을 살피는 기도가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입니다. 내 생각과 맞지 않고 내 뜻과 다르더라도 그분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진정으로 알고 믿기에 기꺼이 그분의 뜻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 순간 우리는 순종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삶을 신실하게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 다른 말로 할 수 있습니다. 사명의 사람이 된다거나, 소명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선 곳이 어디건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바로 그곳에서, 눈을 들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분의 뜻과 말씀에 따라 매순간 최선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오래 무릎 꿇은 사람일수록 그분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사랑과 그분의 섭리를 깨닫게 되므로 그분의 어떠한 명령에도 순종하게 됩니다.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게 됩니다. 세상의 눈에는 맹목적이고 어리석어 보일 수 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사랑과 위대하심을 아는 자녀들은 비록 그분의 인도하심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분의 인도하심은 선하시고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분이 우리 아버지이시기에 인생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먼 미래까지 내다보십니다. 우리의 짧은 시선, 우리의 약한 인내심으로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인생을 그분께 맡기십시오. 그분이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3-39). 사도 바울의 외침이 우리 모두의 고백과 찬양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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