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곳에서 일하고 있어요?”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이 간혹 인사로 던지는 질문이다. ‘아직’이란 단어가 긍정인지 부정인지 아리송해 얼른 답하지 못하고 멈칫하곤 했다. 그렇다. 꽤 오래 신문 편집 일을 해오는 동안 나이만 배불리 먹었다. 일의 능률이 최하로 떨어지는 날에는 “주님, 제 손과 머리를 드릴 테니 무사히 편집을 마치게 해주세요. 주님의 뜻을 전하는 작은 징검돌이 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만 반복한 적도 있고, 쌓인 연륜 만큼 늘어난 타성에 의지한 적도 있다.
어젯밤 잠을 청하는데 ‘스테인드글라스’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성당의 유리창 스테인드글라스는 색색의 유리들을 잘라 붙인 일종의 빛그림 아닌가. 빛이 없을 때에는 칙칙한 유리판에 불과하다가, 햇빛이 비치는 순간 갖가지 색들이 이루어내는 조화도 신비하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그림들은 한 장 한 장이 장인의 진솔한 신앙 고백 아닌가. 내가 편집하는 신문도 그런 스테인드글라스 같다는 생각이 든다. 크고 작은 색색의 글과 그림들이 이합집산으로 모여 있는 것 같아도 그 하나하나에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시다면, 독자들이 신앙의 안경을 쓰고 그 글과 사진과 그림을 들여다보는 거라면, 주님 사랑의 빛에 의해 환하게 드러나는 스테인드글라스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서 내 역할은 색유리들을 닦는 청소부인 것 같다.
‘모자이크’라는 단어도 떠오른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북북 찢은 종이조각들이 이뤄내는 조화. 시종이 분명하게 짜여진 오케스트라보다는 모자이크가 더 어울리는 단어 같다. 진보 성향의 잡지에서 찢어낸 조각, 보수적인 신문에서 찢어낸 조각들이 어우러져 믿음이라는 그림, 하나님 나라라는 그림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내 역할은 또 무얼까? 색의 조화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혹은 종이 모서리가 나풀대지 않도록, 혹시 위대한 장인의 의도에 어긋나는 건 아닌지 눈치 보면서 풀칠하고 조각들을 붙이지만 실수 연발이 특기인 조수인 것도 같다.
시골의 ‘정자’도 떠오른다. 사방으로 트인 정자. 누구나 쉬어가는 정자. 누워 잠을 자는 이도 있고 눈길만 주고 지나가는 이도 있고,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이도 있을 정자. 크리스천 필자들의 인생 궤적이나 가치관, 가고자 하는 길이 모두 다르기에 같은 믿음을 가진 분들일지라도 정자에 자리 잡고 앉으면 끝없는 설전이 벌어질 수 있을 거라는 상상도 해본다.
그러나 그 풍경을 카메라의 롱샷으로 잡는다면, 자연과 어우러진 사람의 무리가 한 장의 사진에 담길 것이다. 머나먼 인생 여정에서 잠시 어깨동무하게 된 신앙인들의 사진. 사진 속에선 자신의 지식이나 의견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일이 무의미해 보인다. 굳이 한 가지 성향이나 색깔을 고집할 일도 아니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넘치면 넘친 대로, 달라 보이면 또 그런 대로, 아니다 싶어도 또 그런 대로, 기다리고 바라보고 받아들여 주는 여유가 생겨난다.
이런저런 홍보 일에 관여할 때마다 늘 쉼이 있는 정자의 풍경을 꿈꾸어 왔지만, 나 역시 사람들의 말이나 감정, 고집, 편견 따위에 자주 흔들리고, 내 안의 잡동사니들 때문에 ‘너’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자주 잊어버리곤 했다. 그러다가 머리가 헝크러진 실꾸리나 쓸모를 다한 새 둥지 같아 보이는 날에 이런 단어들이 줄줄이 떠오른다.
몇 걸음 뒤로 물러나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 섭리의 빛으로 비추어진 세상을... 그러면 이 글을 실을까 말까, 이 필자는 어떻고 저 필자는 어떻고 하는 갈등도, 항의 전화나 소문으로 들려오는 비난 때문에 심란해진 마음도 고요해진다. 주님의 눈에는 성공과 실패, 넘침과 모자람, 프로와 아마추어의 간격이 백지 한 장 차이 아닐까? 여러 단어들을 가지고 상상의 그림을 그리는 동안, 노련한 편집인이 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침묵하면서 내가 해온 일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보람이 마음을 채운다.
앞으로도 ‘아직’ 편집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사람을 만날지 모른다. 앞으로는‘아직’에 대한 대답이 ‘지금’이 될 것 같다. 지금의 이 일을 주님께 온전히 맡기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하고 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