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수입을 세금과 내 소유로 나누듯, 일상도 성과 속으로 나누는가?"

4월 17일은 세금의 날이다. 원래는 4월 15일이 세금의 날이지만 올해에는 주일이어서, 4월 16일이 세금의 날이어야 했다. 그런데, 워싱턴 D. C.에선 4월 16일이 노예 해방의 날이다. 1862년 컬럼비아 특별구에서의 노예해방령 제정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래서 올해에는 4월 17일이 세금의 날이 되었다. 그러나 “세금 자유의 날”은 4월 19일이다. 미국인들은 연방세로 3조1천9백억 달러, 주와 지방세로 1조8천억 달러를 올해 내게 될 것이다. 그 총액은 우리가 의식주로 소비한 것보다 더 많은 액수이다.

벌어들인 것을 세금과 우리 자신을 위해 가질 수 있는 돈으로 나누는 것은 우리에게 자연스런 일이다. 이러한 나눔은 영성 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보통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욕구와 관심사를 가진 평범한 자아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 자아와 다른 무언가-'도덕'이나 '바른 행동'이나 '사회적 안녕'-가 이 자아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점, 즉 자아의 욕구에 간섭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요.”

“'선량하다'는 것은 그 권리 주장에 승복한다는 뜻입니다. 평범한 자아가 이른바 '그릇된' 것을 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 자아가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평범한 자아는 이른바 '옳은' 일을 원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자아가 원치 않는 것이라도 해야 하지요.”

“우리는 이런 요구들을 다 채우고 난 후에 이 불쌍한 자연적 자아에게도 얼마간의 기회와 시간이 주어져서,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삶을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를테면 정직한 납세자의 심정과 아주 비슷한 것입니다. 세금을 꼬박꼬박 내긴 하지만, 그래도 먹고 살만한 돈은 남기를 바라 마지 않는 납세자의 심정 말입니다. 이것은 자연적인 자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길은 다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누가복음 9:23). 성경은 “여호와를 찾고 그분의 능력을 바라보라 영원히 얼굴을 찾으라‘(시편 105:4)고 우리에게 요구한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죄인을 자신에게로 인도하셨다(누가복음 23:43). 베드로와 요한은 걷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 그를 치유함으로써 군중들에게 복음을 전했다(사도행전 3:11-12). 바울과 실라는 한밤중에 감옥 안에서 찬송을 불렀으며, “다른 죄수들이 귀기울여 듣고 있었다”(사도행전 16:25). 요한은 밧모 섬의 감옥을 세계 선교의 발판으로 바꾸어 놓았다(요한계시록 1:9).

C. S.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시간을 종이 위의 선으로 묘사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종이로 묘사해야 한다.

성경이 분명 주님을 위해 주님과 함께 무조건적으로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다면, 우리는 월요일과 주일, 성과 속을 구분할 수 있다는 생각을 어디서 얻는 걸까?

고등학교에서 배운 그리스 신화가 생각나는가? 제우스, 아폴로를 비롯한 판테온의 신들은 올림푸스 산 위에서 살지만, 신보다는 인간처럼 행동한다. 음모를 꾸미고 변덕스러운 그들의 삶은 고대의 통속드라마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은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들에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리스-로마 세계에 가면 다양한 신들에게 바친 사원들을 보게 된다. 고린도에는 아폴로 신전이 보존되어 있다. 아테네, “도시는 우상으로 가득차” 있었다(사도행전 17:16). 로마인들은 그리스 신의 이름을 바꾸고, 그들에게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이러한 신들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의 신들은 그런 관계를 맺기에는 음흉하고 믿을 수 없었다. 대신에 그들은 거래의 종교를 발전시켰다. 신들이 원하는 것을 바치면 신들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준다는 것이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종교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희생을 치른 뒤 자신의 삶을 이어나갔다.

기독교가 그리스-로마 지역으로 들어갔을 때, 일부 추종자들은 이러한 영적인 분리를 채택했다. 그들은 평신도와 목회자를 분리시켰고, 평신도는 구경하고 성직자가 일하는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성경은 신을 멀리 두는 거래의 종교를 제공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랑의 아버지와의 변모적 관계를 제공한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세금은 의무이며 정부와의 거래 관계의 일부이다. 당신은 당신의 영혼을 세금처럼 다룰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당신에게 준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도 있다(요한복음 10:10).

오늘의 매 순간은 주님의 영광과 우리의 선을 위해 사용되도록 주님께 속해 있다.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서 오늘은 온전하게 산다면, 우리는 그분의 힘과 평화와 기쁨을 경험하면서 그분의 빛을 투사하게 될 것이다.

안나 그래함 로츠는 “내 삶에서 예수님의 임재보다 더 원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가?(짐 데니슨 4월 17일 칼럼 발췌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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