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예수님을 따르는 자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를 이루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의 일이 특히 자신의 피조물 중 하나이자 당신의 형상을 반영한 인간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이 세상의 질서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프로젝트에 인간을 당신의 청지기로 참여시키셨습니다.

물론 그 나라는 하나님에 의해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세우는 하나님 나라는 결코 완성된 나라가 아니며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노력에 변화를 더해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완성된 모습을 알 수 없습니다. 최종적으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최고의 행위인 새 창조이며 예수님의 부활이 그 새 창조의 유일한 원형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셔서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모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순종하고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성령으로부터 힘을 얻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58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주 안에서 하는 일은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일은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행한 모든 일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연속성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의 결과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한 것과는 다르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불연속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때가 차서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의 일부가 될 일을 우리가 지금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감사와 친절의 행위, 돌봄과 양육, 위안과 지지와 같은 행위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부가 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기도, 성령의 인도를 받은 가르침, 복음 전파, 교회를 세우고, 거룩을 수용하고 구현하며, 서로 사랑하여 하나 됨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로 존경받게 하는 이 모든 행동들 모두 언젠가 하나님께서 만드실 새로운 창조에 포함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놀라운 세상을 다시 창조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부활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 때 신비롭게 지속되는데, 우리가 현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이 결코 낭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에서 지속될 것입니다. 연속성을 가진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세상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모습으로 향상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불연속성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일이 새로운 세상에선 어떤 모습으로 이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부활절 아침 예수님이 그 무덤에서 걸어 나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은사는 지금 이곳에서 하나님의 회복된 창조를 나타내는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징표들을 보여 주라는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에 우리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하는 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정의와 자비의 행위, 생태학적인 노력, 하나님의 청지기 이미지를 창조세계에 반영하고자 하는 노력에 필요한 위임 통치령입니다. 새 창조에서는 에덴동산을 돌보라는 옛 아담이 받은 위임 통치령이 재확인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창조의 선함을 재확인하는 것이며. 성령의 은사는 우리를 원래의 온전한 인간으로 회복하여 그 위임 통치령을 성취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향한 청원이며, 그 일에 동참할 수 있는 힘과 능력과 지혜를 구하는 청원입니다. 하나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여야 합니다. 각 교회가 성령 공동체가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한 몸이 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무엇보다 세상의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 방식에 따라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결코 자신의 힘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끝없이 힘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선 인간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능력이 바닥난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내주와 약함의 신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능력의 원천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자세히 보여 줍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것을 보고도 보지 못하거나, 보아도 외면하려 듭니다.

힘의 포기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기 위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약함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인하고 배워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사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의 진정한 의미였습니다. 그들의 소유가 바닥나고 그들의 능력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울 수 없을 때마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무방비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배우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을 포기하지 못하고 통제를 포기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40년 간 광야에서 헤매고도 그것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습니다. 광야 생활 40년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를 배우는 훈련의 시기였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들은 자신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뢰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약함과 하나님의 내주하심입니다.

인간의 약함 안에 하나님께서 내주하신다는 개념은 하나님 나라 백성이 배워야 할 하나님 나라의 근본입니다. 이 개념을 안일한 자세로는 배울 수 없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두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내주라는 것이 상당히 두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되 나는 제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출 3:1-5).

이처럼 하나님의 내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두려움 없이 하나님의 임재를 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을 통해 언제든 하나님 앞으로 달려갈 수 있는 은혜가 주어졌지만, 두려움마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언제나 경외하는 마음, 두렵고 떨리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약함

두 번째 명심해야 할 것은, 인간은 결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연약한 상태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내주 또한 완전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약함은 결코 완전한 수준이 아니며 자신의 능력을 전적으로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약한 상태가 되어도 전적으로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구하려는 자신의 노력에 대해 날마다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죄성을 반복해서 인식힐 뿐입니다. 우리의 죄성을 인식할 때마다 자신을 쳐서 복종시킨다면, 하나님의 내주하심을 점점 더 온전하게 알아갈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 백성이 되기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약함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샬롬의 나라인 것은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내주에 필요한 조건은 바로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약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한 본성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무의식적으로 세상의 방식을 따르게 만듭니다.

큰 교회가 되어야 큰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시적인 성취를 이루어야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약함에 대해 끊임없이 말합니다. 신약성경은 약함에서 시작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에서 이방 여인과 율법을 범한 여인 네 명을 언급하고(마 1:1-17), 요셉이 마리아와의 관계를 조용히 끊겠다고 생각함으로써 마리아가 처하게 되었던 위험을 보여줍니다(18-25).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산상수훈의 팔복 선언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시작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욕을 듣고 박해를 받으며 우리를 거스르는 모든 악한 말을 들을 때 복이 있다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마 5:1-12).

마태복음 8:17에서 마태는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라고 지적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짊어지셨음을 강조합니다. 빌라도의 병사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로마의 공식적인 권위의 표시로 봉인하는 장면에서도 세상 권세의 방식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약함의 방식이 강조됩니다(마 27:62-66).

작은 자

마가복음에서는 열두 제자와 대조되면서, 참된 믿음을 보여 주는 "작은 자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약함의 주제가 드러납니다. 마가복음을 연구한 데이비드 로즈와 도널드 미키는 이 작은 자들이 "목숨을 잃어버리고 자기를 부인하고 지극히 작은 존재가 되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살았던 실제 사례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저자가 창조한 이 세계 속에서 우리는 이런 것들, 곧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삶이 요구하는 철저히 새로운 질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 때문에 가능해지는 새로운 일들,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의 위대함,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의 파괴성, 구속적인 고난 속에 감추어진 능력, 권력과 성공을 얻고자 국가와 종교를 오용함, 종교적인 헌신이 가져올 수 있는 맹목성, 살아남아야 한다는 심리적 유혹, 자기 부인과 죽음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에 대한 깊은 저항감, 지극히 작은 자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의 어려움, 하나님의 통치에 신실하고자 할 때 따르는 고난 등을 경험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그의 나라에 참여하려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10:14-15). 마가는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베드로를 예수님이 "사탄"이라는 가장 강력한 말로 꾸짖으셨다고 기록했습니다(8:31-38).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소외된 자. 여자, 이방인 등 약한 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담고 있습니다. 복음서의 첫 부분부터 수난 이야기 끝의 무덤에 머물렀던 여자들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이런 특징은 분명히 드러납니다. 누가복음의 앞부분 몇 장만 읽어도 "작은 자들"에 관한 강조를 발견합니다. 1:26-56에서도 제사장이었던 사가랴와 대조되는 마리아의 겸손과 복종과 사려 깊음을 발견합니다. 구세주의 탄생을 전하는 첫 번째 사자들로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목자들이 택함을 받은 것과(2:16-20) 예수님의 부모가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제물을 성전에 가져갔던(2:22-24, 레 12:8 참조)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약한 그리스도 본받기

또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비유들도 세상 권세의 관점과 정반대입니다. 세리가 의인이 되고(눅 18:9-14), 이방인이 이웃 사랑의 모범이 되고(눅 10:25-37), 인간의 성취보다 새와 백합화가 더 영광스럽고(마 6:26-34), 가장 작은 씨앗이 새들의 안식처가 되며(마 13:31-32), 주인이 종에게(종이 주인에게가 아니라) 엄청난 신뢰를 두며(마 25:14-30),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쉬고(눅 16:19-31), 부자는 쌓아놓았던 모든 것을 잃으며(눅 12:13-21),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요 10:1-18). 우리의 약함이 의미가 있는 것은 바로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내주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우리의 열매 맺음이 그리스도의 내주에 대한 우리의 의존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15:3).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에 대한 가장 좋은 모범입니다. 그는 신랑의 친구가 된 것처럼 기뻐하며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선언했습니다(3:28-30). 우리는 학대당하고 거절당한 사마리아 여인을 끌어안으시는 예수님을 보며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에 놀랍니다. 그 은혜는 그녀를 자유롭게 하였고 그녀를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사자로 변화시켰습니다(4:1-42). 베드로는 그의 연약함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그래도 주님은 그에게 양들을 먹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21:15-19).

빌 와일리 켈러만은 "만일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목회적 권위와 사명을 부어받았다면, 그것은 바로 그의 약함에 기초한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은혜이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자유다. 베드로의 목회 사역은 거기서 시작하고 거기서 끝이 난다."고 말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는 사회와 이웃을 향한 그들의 강력한 복음 증거가 그들의 약함에서 나오게 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요한이서와 요한삼서만이 직접적으로 약함의 이미지가 드러나지 않는 예외적인 서신입니다. 약함을 강조하고 옹호하는 책은 고린도전후서와 히브리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입니다. 바울의 나머지 서신들에서도 예외 없이 약함에 대한 메시지가 울려 퍼집니다. 신약성경은 약함에서 시작해 약함으로 끝납니다.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의 내주와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려면, 약함을 알고 약함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할 때 그것이 곧 약함을 본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스스로 약함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듯이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는 바울의 글들, 고난을 겪으심으로 우리의 모범 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라고 격려하는 베드로의 글들, 고난 중에도 인내하라고 강권하는 계시록 본문들은 오늘날의 교회들에게도 진실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약함과 하나님의 내주는 하나님 나라의 골격이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 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 또한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내주를 드러내는 소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한사코 약함에서 벗어나려는 육체의 강력한 요구를 이겨내고, 기꺼이 하나님 나라 방식인 약함을 배우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결정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질문

왜 우리는 목사들을 약한 자들을 돌보는 목자가 아닌 성공적인 CEO로 바꾸어 놓았는가? 왜 우리는 고난 속에서 모델이 될 수 있는 목사를 찾기보다 성공 지향적이고 카리스마적인 목사를 찾는가? 왜 우리의 교회는 무한정 커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왜 우리는 말씀에 순전히 귀를 기울이는 대신에 세상적인 방식에 의존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약함과 하나님의 내주라는 하나님 나라의 근본 원칙을 버리고 자신을 의지하고 세상의 방식을 택함으로써 하나님 나라로부터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약하게 됨으로써만 예배할 수 있다. 자기 능력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감히 하나님께 예배하려 하는 주제넘은 자에게 화 있도다. 참 하나님은 오직 영과 진리로만 예배 받으실 수 있다. 그러나 이 진리는 바로 당신의 전적인 약함을 선언하는 것이다. 사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죄렌 키에르케고르)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을 더 많이 신뢰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적은 것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인간적 약함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장애물이 아니다. 약함을 죄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약함은 좋은 것이다.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단지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힘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경험하고 그 힘에 의탁하는 것을 의미한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창립자인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힘을 해체하는 것, 바로 이것이 은혜의 뿌리다. 우리 안에서 아주 작은 힘이 일어난다면, 그만큼 성령님과 하나님의 권위는 뒤로 물러설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직 한 가지 가장 중요한 통찰이다."(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진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약함의 의미를 깨닫고 약한 자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청원을 진정으로 드리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가 불타오른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약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비움으로써 거친 세상에서 속수무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질수록 온전해지는 하나님의 내주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내가 약할 그 때에 강함이니라"(고전 12:10)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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