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기준?

그렇다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영들의 분별』이라는 글로 유명한 가톨릭 예수회 신부 자끄 기예의 기준들은 한 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정확하고 신선하다. 그의 기준들을 다섯 가지로 줄여 보았다.

첫째, 나쁜 징조를 예언하는 자가 좋은 징조를 예언하는 자보다 참된 예언자일 경우가 많다. 예언자의 존재 이유는 왕에게 아첨하거니 백성들을 달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의 가감 없이 직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한 왕과 백성, 거짓 선지자들의 놀림과 지탄과 박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8-9).

둘째, 참 예언은 사인과 기적을 통해 알게 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탄도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분별의 여정에서 사탄 혹은 악과의 대적을 빼놓을 수 없다. 왜? 우리들의 분별을 훼방하는 일등공신이 바로 사탄이고, 악이기 때문이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되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오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 그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왕상 17:1-7).

셋째, 참 예언은 이스라엘의(우리들의 기본적인) 믿음 및 충절(계시의 말씀에 대한)과 상충하지 않는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뜻과 심판과 구원, 그리고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었다(사 2:2-3; 렘 23:5; 겔 34:23-4, 37:24-25). 예언과 말씀의 일치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들의 기본적인 믿음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신묘한 예언이나 기적도 거짓이다. 문제는 이런 차이를 아는 분별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늘 이단이 성행한다!

넷째, 예언자의 예언자적이고 경험적인 소명이 무엇인가를 보면 안다. 이들의 소명과 선포는 아무런 표징 없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제단에 있는 숯을 입술에 댐으로 악이 제하여졌고 죄가 사하여졌다(사 6:6-7). 이런 정결의식이 끝난 후 이사야는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고백한다. 출애굽의 영웅 모세는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다. 그리고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하나님의 기적을 직접 체험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 이스라엘의 음란함과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멸망을 선포한 호세아 선지자는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아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았다(호 1-3장).

다섯째, 도덕성과 삶의 고난이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분별 기준이다. 목회자들의 성적 타락이 특히 문제가 되는 요즈음, 분별하는 교인이 되기 위해 귀담아 들을 말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파멸로 인해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는 고난을 받았다(애 3:48).

70년의 바벨론 포로기가 끝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3차에 걸쳐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다. 이제 이들에게 더 이상의 고통은 없는 것일까?

구약과 신약의 중간에 끼인 이스라엘의 분별

에스라와 느헤미야로 이어지는 귀환기의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고 분별을 가진 백성으로 거듭나길 원하셨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통해 B.C. 444년에 나머지 포로들을 귀환시켰다. 느헤미야의 리더십과 함께 귀환 후의 백성들은 52일만에 허물어진 성벽을 완공하기도 하지만, 느헤미야가 자리를 비운 사이(바벨론으로 돌아간 사건, 느 13:6), 그들은 안식일을 범하고(느 13:18), 잡혼을 하며(느 13:27), 또 다시 죄를 저지른다. 귀환 이후 회복의 기쁨도 잠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시 영적인 타락과 파멸의 악순환을 반복한다.

느헤미야 시대에 같이 활약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거짓 제사장들을 탓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말 2:2).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사라진 분별력을 회복하기는커녕, 후손이 많아짐에 따라 부족 수가 늘어나고, 타국의 노예가 되고, 출애굽을 경험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거주민이 되고, 나라가 되며, 왕이 세워지고, 선지자들이 나타나고, 이웃 나라들과 전쟁을 하고, 멸망하고, 이웃나라의 포로로 수난을 겪고, 오롯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나라를 되찾는 파란만장한 역사의 고비들을 지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들의 영적 분별력은 태초에 하나님이 먼지를 빚어 세상에 창조해 내신 후 보기 좋다고 말씀하셨을 때, 똥오줌 못 가렸을 아기 수준에서 조금도 발전하지 못했다. 하나님(부모)의 직접적인 사랑에는 반응하되, 돌아서면 곧바로 불평하고, 갈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수준의 분별력이 다였다. 그러니 왕의 눈을 가리고 백성들을 기망하고 하나님을 모욕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의 통치권은 페르시아에서 그리스로 넘어가고(B.C. 323), 유대인에 대한 그리스의 학정과 하나님의 신성모독 행위에 반기를 든 마카비 가문의 혁명적인 승리로 B.C. 164년에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운다. 이 왕조는 B.C. 63년에 로마가 이스라엘을 점령할 때까지 유다를 다스린다.

이후 신성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작금의 속박에서 구해 낼 메시아를 또 다시 기다리게 된다. 이스라엘이 원한 메시아는, 하나님의 뜻과 음성을 분별하도록 돕는 친절하고 인격적인 분이 아니라, 당장 로마의 통치에서 구출해 줄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지도자로서의 메시아다. 하나님은 과연 이들의 염원에 응답하실까?

구약의 말라기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독생자를 직접 이 땅으로 보내시기 전까지 400년 동안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각자의 삶을 살아내야 했다. 하나님은 침묵 중이고, 이스라엘의 밤은 여전히 길었다. 누가 메시아인지, 언제 그가 오실지 이스라엘은 분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까지나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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