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Spirituality 74

“예수 비유 묵상” 네 번째 시간인 오늘은 재물에 대한 주제를 가르쳐 주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6-21)를 함께 묵상합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밭에서 풍성한 소출을 얻은 한 부자가 곡식을 저장할 곳간을 크게 짓습니다. 새로 지은 곳간에 소출로 얻은 곡식을 가득 쌓아놓고 부자는 크게 기뻐하고 안심합니다. 그날 밤, 하나님은 이 부자에게 나타나셔서 “오늘밤에 너의 영혼을 내가 찾아가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냐”면서 그의 어리석음을 꾸짖으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무언가 미래를 준비하지 말라는 뜻의 비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경제적인 것을 포함해서 미래를 준비하고 계획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이 비유는 재물 자체가 나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도 아닙니다. 성경은 돈이 가진 위험성을 지적하지, 돈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오늘의 비유는 재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재물에 대한 태도는 우리가 삶을 바라보는 자세와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 렘브란트

삶의 안전을 어디에서 찾는가?

오늘의 비유에서 하나님은 부자에게 어리석다고 책망하시는데, 부자의 어리석음은 세 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이 부자는 재물이 삶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자는 곳간에 곡식을 가득 쌓아 놓고 이제는 평안히 쉬고 먹고 즐거워할 수 있겠다고 이야기합니다(눅 12:19). 자신이 쌓아 놓은 재물이 삶의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우리는 삶의 안전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개인은 개인의 삶의 안전을 추구하고, 국가는 국가적인 안전(national security)을 강조합니다. 어쩌면 이 사회는 안전(security)에 집착하고 있는 사회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을 우리는 재물에서 찾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붙잡는 재물이 삶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어거스틴이 바닷가에서 만난 한 소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소년이 바닷가에서 모래 구멍에 물을 붓고 있었습니다. 물을 붓고는 바다로 달려가서 바닷물을 가지고 돌아와 또 구멍에 붓습니다. 어거스틴이 소년에게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소년은 모래 구멍에 지중해를 담으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모래 구멍에 지중해를 담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게도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곳간에 재물을 쌓으면 삶의 안전과 행복 또한 담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어리석음입니다.

삶을 통제하려는 어리석음

이러한 어리석음은 자연스럽게 두 번째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어리석음을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눅 12:20) 부자는 자신이 삶을 준비하고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곡식을 모을 곳간을 새로 짓고, 여기에 곡식을 쌓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자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통제한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부자가 이루었다고 생각한 한 해의 수확은 햇볕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부자는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은혜로 주어진 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신이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자가 모르고 있었던 또 한 가지는 인간의 유한성입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부자에게 오늘밤 그의 영혼을 되찾아가면 그 쌓아 놓은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늘밤에라도 “오라” 말씀하시면 당장이라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은 채 내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고, 삶을 계산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삶을 통제하려는 것을 내려놓으라고 초대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비유의 마지막 메시지로 이어집니다.

하나님 안의 부요함

오늘의 비유에서 부자가 가지고 있는 세 번째 어리석음은 부요함의 근원을 모르는 것입니다. 부자는 삶의 부요함을 재물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예수께서는 삶의 진짜 부요함은 다른 곳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21). 이것이 오늘의 비유의 결론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경제적으로 미래를 준비하지 말라는 말씀도 아니고, 재물 자체가 문제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오늘의 비유는 우리의 근본적인 삶의 자세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삶의 부요함을 어디에서 찾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재물에서 삶의 부요함을 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부요함을 찾고 있는지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부요함을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삶의 부요함을 갈급해하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 하나님 안에서 부요함을 찾을 때, 우리는 삶의 뿌리깊은 갈증을 해결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을 경험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아 주시는 진짜 부요함을 경험합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참 이상합니다. 삶의 문제와 어려움은 나를 삼킬 듯이 달려드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고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부요함을 경험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찌 정권에 반대하다가 옥에 갇혀서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서른 아홉살의 젊은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진 신학자입니다. 본회퍼가 옥에 갇혔을 때 지인들에게 편지한 것을 모아 출판한 것이 바로 『옥중서신』입니다. 이 책에는 본회퍼의 아까운 신학적인 천재성과 함께 그의 깊은 신앙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옥중서신』에는 본회퍼가 드렸던 아침기도가 실려 있습니다. 본회퍼는 동료 수감자와 자신을 위해서 이러한 아침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이른 아침에 당신께 호소합니다. 내 안에는 어둠이 있지만, 당신께는 빛이 있습니다. 나는 고독하지만, 당신께서는 나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나는 소심하지만, 당신께는 도움이 있습니다. 나는 불안하지만, 당신께는 평안이 있습니다. 내 안에는 노여움이 있지만, 당신께는 인내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길을 알지 못하지만, 당신께서는 나를 위한 바른길을 아십니다. 하나님, 지난 밤 고요한 밤을 주셔서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새날을 주셔서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내 과거의 삶에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을 보여 주셔서 찬양과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내게 많은 친절을 베풀어 주셨으니, 이제는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도 감당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옥중에서 하나님의 도움과 평안을 간구하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찬양하고, 고난을 감당하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본회퍼는 이 기도를 아침마다 드리면서 자신의 삶의 마지막 날들인 옥중 생활을 감당하였습니다. 본회퍼는 하나님 안의 부요함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옥중에서 경험하며, 하나님 안에 있는 부요함으로 삶의 고난을 감당하고자 하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바로 삶도 죽음도 넘어서서 하나님 안에 있는 부요함을 경험하는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삶의 부요함을 어디에서 발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십시오. 그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삶의 토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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