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자기중심적인 종교

"어떻게 내가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떠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질문입니다. 회심이란 바로 이 질문이 변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 대신 자리 잡아야 할 진정한 하나님 백성의 질문은 "나라이 임하옵시며"입니다.

자기중심적인 문화는 자기중심적인 종교를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예수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가 됩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해 듣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하다는 것입니다. 병 낫고 건강해지고 정신적으로 안정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성공하고 출세하고 돈 더 많이 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기적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들의 핵심에 들어 있는 전제가 바로 "예수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입니다.

예수는 당신을 더 행복하게 만들고, 더 만족스런 자신을 얻게 하고, 더 잘 적응하게, 더 번영하게 해줍니다. 예수는 재빨리 상품이 되고, 소비 대중들에게 매력적으로 포장되어 공격적으로 판매됩니다. 예수의 가장 큰 장점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신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예수를 선택합니다. 그 예수는 자신의 모든 것을 채워 주고 만족시켜 주는, 저비용 고효율의 신입니다.

그렇게 선택 받은 예수는 우리의 삶을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향상시키십니다. 회심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고 세상을 섬길 것인가를 묻지 않고 예수께서 어떻게 내 삶을 만족시켜 주시고 충족시켜 주시는지를 묻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조하면 그 나라는 내게 어떤 면에서 유리한가를 따져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를 이끌어가고 있는 '자기애'의 위력입니다.

복음 전도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했지만 진정한 회심의 징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교회가 영적 침체에 빠진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돈과 권력과 성공에 몰두합니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순응이며 믿음에 대한 거절이라는 것을 꿈에도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오늘날의 기독교는 뒤틀려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비단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았던 사람들에게 주기적으로 찾아든 위기나 혼란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위기와 혼란에 관한 교훈을 되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의 삶에 반복적으로 나타난 위기와 혼란의 특성은 세 단계로 이루어진, 신앙과 불신앙의 순환입니다.

신앙과 불신앙

하나님 백성이 자신이 누구인지, 누구에게 속한 자인지 망각할 때 위기와 혼란은 시작됩니다. 정체성을 망각하는 순간 그들은 곧 우상숭배에 빠지고 맙니다. 그런 그들에게 선지자가 나타나 다시 주께 돌아오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세 단계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신앙과 불신앙 사이를 쳇바퀴 돌듯 순환합니다. 이것이 창조 이래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교회사 속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똑같은 순환을 반복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당대의 문화에 현혹되어 방황하다가 그 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해 자신들이 우상 숭배에 빠져 있음을 지적당합니다. 그러나 문화의 지배를 받아 변질된 사람들은 돌아오라는 주님의 소리를 들어도 회개하기보다 양립할 방안을 찾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단 한 번도 여호와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다만 여호와와 함께 바알을 예배하고자 했습니다.

자기애에 빠진 사람이 자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묻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며, "어떻게 내가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을까?" 의 답이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 사랑의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회심이란 감정이나 교리에 대한 동의가 아닙니다. 단순히 교회에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회심은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위한 섬김 가운데 확고하게 자리잡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기를 바라는 고백만이 아니라, 기도자 자신이 그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단의 고백입니다.

그 도를 좇는 사람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 도'를 좇는 사람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구별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으며, 구별된 그들의 삶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 닦는 것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변화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그들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주변에서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어떤 특정한 행동과 동일하게 여겼습니다. 그 당시에는 믿는 사람이건 믿지 않는 사람이건 모두가 동일하게 인식할 수 있는 기독교적 생활 방식이 존재했습니다. 누구라도 그들의 생활을 보면 그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삶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생활 방식은 산상수훈을 비롯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그대로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따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기독교 제자도가 하나님 나라를 축으로 하여 돌아간다는 점이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분명한 사회적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고 나누는 열린 공동체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서로를 향한 사랑, 억압받는 자를 향한 사랑은 그들을 특징 짓는 가시적이고 분명한 실체였습니다. 그들이 살인과 차별과 황제 숭배를 거절하는 모습도 누구든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아리스티데스는 로마 황제였던 하드리안에게 보낸 글에서 그리스도인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모든 과부들을 돕고, 자신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었던 자들의 고아 된 자녀들도 돌봅니다. 만일 줄 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만 하면 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자에게 값없이 줍니다. 나그네를 발견하면 이들은 집으로 데리고 옵니다. 마치 나그네가 진짜 형제라도 되듯이 행복해 합니다. 이들은 그들을 통상적인 의미에서 형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성령을 통해 얻은 형제라고 여깁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붙여진 '도를 좇는 사람들'이란 명칭은 이들이 살아낸 하나님 나라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체험'의 사람들이라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올바른 교리의 사람들이라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사람들이라고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공동체

두 번째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회심한 개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공동체를 이루고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처음으로 하신 일은 공동체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과 삶을 나누고 또 다른 사람들과도 그 삶을 나누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는 공동생활에 참여하던 사람들을 통해 공표되었습니다. 그들의 코이노니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려고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에게 주어진 가장 확실한 선물은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속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새로운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로 결속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코이노니아는 복음의 복음 됨을 증명하는 참된 징표였으며, 그들의 삶 자체가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복음 선포에 앞서 그들의 삶 자체가 강력한 증거였습니다. 말과 행위의 하나 됨은 복음 선포에 힘과 권세를 부여했습니다. 마이클 그린은 초기 교회의 복음 전도에 관한 연구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들은 이교도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그리고 사람들이 뭔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라고 인식했던 사랑과 상호 돌봄의 사회를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신빙성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대가 동텄다는 그들의 주장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초기 교회의 복음 선포는 말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라는 실체를 드러내 복음의 복음 됨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일은 우리의 힘으로 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는 이론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공동체는 신기루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새 질서가 세상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사랑은 일상이 되었고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사회 안에서 약자들은 보호 받았고, 나그네들은 환대를 받았습니다. 사람들이 치유되었고 가난한 사람들과 파산한 사람들이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인지 그들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사용했지만 그들 가운데 아무도 궁핍한 자가 없는 새로운 사회를 경험하며 그들은 기쁨이 충만했고, 매일매일 감사와 찬양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터툴리안에 의하면, 사람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주시했고, 이렇게 탄성을 질렀다고 합니다. "이들이 서로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보라!"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복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복음

복음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들을 하나로 묶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로 흘러갔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했던 경제적 나눔은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파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급진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은 그들의 특징으로 자리 잡았고 그들에게 명성을 더해 주었으며, 이웃 사랑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회심은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좋은 소식, 즉 하나님 나라를 향해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회심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예수 그리스도께 바치는 것, 예수님의 새 질서에 가담하는 것, 새로운 공동체의 친교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이웃과 화평하게 되고, 세상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의 목적들과 불가분의 관계로 한데 묶이는 것입니다.

복음 전도의 목적은 사람들을 회심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회심의 총체적 의미를 담은 변화로 사람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기중심적인 세상에 휘둘려 "예수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에 머물 것인지,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 나라의 깃발 아래 살 것인지의 여부를 단호하게 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합니다. 어떠한 사회로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침투합니다. 주후 1세기이건 21세기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복음 증거는 개인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시적인 증거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성경적 복음 증거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빛 가운데 어떻게 "어둠의 일을 벗는지," 어떻게 "낮에와 같이" 살아가는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롬 13:12-13).

복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전복하는 메시지입니다. 복음 전도자의 사명은 복음을 쉽게 만들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명이 될지라도 참된 회심자가 나오도록 복음을 바르고 분명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복음 전도입니다. 복음 전도는 사랑을 나누는 것이며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는 사람 역시 삶에 있어서의 변화를 요구받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의 일원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와 복음을 전달 받는 자가 하나님 나라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드러내는 사명을 담당한 자가 드리는 간절한 염원입니다.

자신을 향한 질문

자신을 향해 질문해 보십시오. "예수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습니까? 진리는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좁은 길이었습니다. 그 길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도를 좇는 사람들"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떠한가? 그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세상에 의해 왜곡된 기독교를 믿고 있다면 돌아서십시오.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주님께 돌아설 수 있는 용기를 구하십시오.

우리가 가는 길은 결코 쉽고 편한 길이 아닙니다. 얼마나 불가능해 보였으면 "그 도를 좇는 사람들"이라고 불렀겠습니까? 그러나 그 길이 바로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청원하는 우리를 통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임했던 그 나라는 반드시 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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