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찬양팀에서 드럼을 연주하는 30대 후반의 남자 성도가 있습니다. 너무 귀하게 여겨져서 언제부터 드럼을 치기 시작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유튜브를 보고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혼자 독학으로 배운 사람치고는 실력이 상당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가장 좋은 대학 학부는 유튜브”라는 말이 있습니다. 학위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관심을 가지고 잘 이용만 하면 전문적인 정보와 지식을 얼마든지 취득할 수 있습니다. 좋은 용도로 사용하면 인터넷은 얼마든지 자기 계발과 나눔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저도 유튜브나 기타 SNS를 자주 이용합니다. 목회 자료나 신학적 지식 습득의 좋은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삶의 지혜와 실용적인 지식도 많이 얻습니다. 요즘 저의 클릭을 부르는 제목들이 있습니다. “하루 5분 운동으로 일주일만에 뱃살 빼기”, “영어 원어민처럼 잘하기”, “갈등을 해소하는 지혜로운 말하기” 등등... 들어가 보면, 과장 광고가 아니라 할 만큼 실질적이고 검증된 제안들이 잘 편집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운동에 관한 동영상을 반복해서 본다고 해서 뱃살이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어 잘하는 법을 알려 주는 동영상을 시청한다고 해서 영어가 들리거나 발음이 좋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대로 실행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도 반복해서 꾸준히. 그래야 아랫배도 들어가고 영어로 연설도 하게 됩니다. 사십 가까운 나이에 드럼도 칠 수 있고요. 원리만 시청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이것만 그럴까요? 구원도, 영적 성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주 듣는 질문 가운데 구원에 관한 것이 많습니다. “구원 받았다는 의미는?”, “믿음과 행위의 관계는?”, “한 번 구원은 영원한가요?” 등등. 이러한 질문은 신학적으로 중요하고, 신앙의 기본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사변적이고 지극히 공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묻고 싶고, 살피고 싶습니다.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지, 그런 질문을 할 때의 심리나 영적 상태가 어떤지를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적법하게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고 합시다. 드디어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변에는 시민권을 얻었어도 영어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제한적인 만남과 활동으로 일상을 보냅니다. 사고방식도 이민올 때 그대로입니다. 그가 과연 미국에서 사회적, 문화적, 법적 혜택을 다 누릴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을 미국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법적으로는 미국 사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인인 그 사람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네요. 영어 못하는 시민권자도 미국인이고, 고국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바로 미국이라고.

또 하나 생각해 볼까요? 남녀가 서로 사랑을 고백하고 동행을 약속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옆사람에게 “우리 서로 사랑하지만, 이 사랑의 관계가 영원할까요?” 라고 묻는다면, 그 사람의 진실성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옆사람이 ‘그 사람’의 사랑에 대한 확신과 영원성을 보장해 줄까요? 옆사람이 “오래가지 못할 거야”라고 말하면, 이제껏 진실하고 영원하다고 믿었던 그들의 사랑은 깨지고 서로를 의심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과 답변 모두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요? 아니면 질문이 잘못된 것 아닐까요?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실재입니다. 믿음은 믿은 바대로 실행될 때 비로소 ‘실재’하는 것입니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면 성인병이 낫는다는 진리는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야만 증명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만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현재’ 그리고 ‘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교리는 안내자일 뿐입니다. 신학자의 설명이 우리를 구원해 주지 않습니다. 구원은 바로 나 자신의 믿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믿음 안에서만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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