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언제쯤, 어떻게 죽게 될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분의 대표는 예수님이시다. 뛰넘절(유월절, Passover)이 시작되기 전, 제단에 드려지는 어린양처럼 죽게 되신다는 것, 예루살렘에서 죽으신다는 것, 많은 고난을 받으신 뒤에 죽으신다는 것, 십자가에 달려 죄인처럼 죽으신다는 것, 죄인 곧 강도들 사이에서 죽으신다는 것, 그리고 죽으신 뒤에 다시 살아나시게 된다는 것 등을 제자들에게 몇 번이나 미리 알려 주셨다. 그리고 그렇게 죽으셨고 또 살아나셨다.

하지만 예수님 외에는 자신이 언제쯤, 어떻게 죽을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간혹 예감이라는 것이 있어서 곧 죽을 것을 미리 느끼는 사람들은 있다. 사도 바울도,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딤후 4:6)라고 했다. 로마 감옥에서 죽음을 명백하게 예감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그토록 훤하게 미리 알 수는 없었다. 아마도 죽음을 미리 안다면 지레 겁을 먹고 근심, 걱정에 휩싸일 것 같아서 절대 비밀에 감추어 두신 것 아닐까. 

아직 70대라 요즈음으로는 젊은 나이지만 그래도 죽음에 대하여 이런저런 생각을 더 자주 하게 된다. 무엇보다도“은혜롭게 죽어야 할 터인데......”그런 말이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온다. 가령 교통사고나 총에 맞아서 참혹하게 죽는다면 은혜가 되겠는가. 관광 다니다가 죽거나, 특히 도박장에서 꼭 한 번만 ‘땡기겠다’고 했다가 심장마비로 죽는다면 그게 될 일인가. 평생 쌓아 올린 목회 생애를 마지막 한 순간에 폭삭 망치게 된다.  

“주님, 되도록 설교하다가 강단 위에서 쓰러져 죽게 하시옵소서.” 담임목회를 할 때는 그런 기도를 가끔 드렸다. 그런데 은퇴하면서 설교의 기회가 대폭 줄어들었고 더 늙으면 아예 설교하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강단설교 대신 ‘글로 읽는 설교’를 틈날 때마다 써가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컴퓨터 앞에 항상 앉아 있기는 어렵다. 신학대학원에서 강의하다가 죽는다면 그것 참 ‘영광, 영광, 할렐루야’일 법도 한데......그러다가,“주님, 찬양하다가 죽게 하시옵소서.” 그런 기도로 바꾸기도 했다. 그래서 찬송가를 담임목회 할 때보다 더 자주 부른다. ‘주의 인도하심 따라’ 그런 찬송도 부르고,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혹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도 부른다. 길을 걸을 때에나 운전 중에도 부른다.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기도하면서 숨을 거두게 하옵소서.”이다. 기도는 어떤 일을 하든지 그것과 동시적으로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밥 먹으며 기도하고, 잠자면서 기도하고, 걸으면서 기도하고, 운동하며 기도하고, 운전하며 기도하고, 설교하며 기도하고, 성경 읽으며 기도하고, 전도하며 기도하고, 조각글 쓰며 기도하고, 기도 요청한 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래서 누가 먼저 죽든지, “기도하다가 주님 품에 안겼다.”고 증언해 주기로 우리 부부가 서로 약속했다. 그러고 나니 내 영혼이 무척이나 시원했다. 십자가 위에서 일곱 기도만 남기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이제야 조금 따라나서게 된 것 같았다.

 <대표 저서: 목회자의 최고표준 예수 그리스도>

저작권자 © 크리스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