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세상에 이런 일이'란 한국 티브이 프로에서 쓰레기를 주워 집 안팎을 가득 채운 여인을 본 적이 있다. 가난에 대한 불안과 염려, 정신적 충격 때문에 쓰레기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이라 했다. 그녀를 달래서 치워낸 쓰레기 분량이 어마어마해서 놀랐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병들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미국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hoard'라는 낯선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무슨 프로인가 했더니, 맙소사! 쓰레기 모으던 여인과 비슷한 미국 여인들을 쉬지 않고 소개하고 있었다. 10년 동안 쓰리프트 스토어(중고품 가게)에서 중고품을 사들인 여자, 20년간 장식품만 사들인 할머니, 몇 가지 품목에 특히 집착하는 여인, 쓰레기를 버리지 않아서 집안을 쓰레기 집하장으로 만든 여인 등이 연이어 등장하는데 심장이 후들거렸다. 등골이 서늘했다.

집안 풍경이 집주인의 마음 풍경을 반영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예쁘게' 꾸며놓은 방의 주인은 마음도 예쁘게 꾸미는 사람일까? 마음이 예쁜 것과 마음을 예쁘게 꾸미는 것 사이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건 세월이 가르쳐 주었다. 마구 어질러진 방도 있다. 질서에 대한 거부? 저항? 아마 내 마음도 내 집의 풍경에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만약 마음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을 뒤져서 물건들로 표현한다면 내 집 혹은 내 방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는데 한숨이 나온다. 단 한 순간이었다 해도 마음 어느 구석에 새겨져 있을 욕심, 집착, 중독적인 면면들, 마음에 새겨진 그것들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심리학자들이 말하던데...

TV에선 그들이 생매장되었다고 표현했다. 그들의 병명은 Hoarding(저장강박장애), 취미 수준의 수집과는 다르다고 했다. 이러한 정신 질환 전문의가 있었고, 그들이 물건을 정리하고 버리도록 도와주는 도우미도 있었다. 미국에만 환자가 200만 명쯤 있다는 기사도 신문에서 보았다. 남미에서 온 이민자로 보이는 흑인 모자는 둘 다 물건을 정리할 줄 모르고 사방 쌓아두기만 하다가 집안에 발 들일 틈이 없어졌다. 물건의 노예가 된 그들의 집에 친구나 이웃들이 찾아올 수 없었으며 그들은 고립되어 버렸다. 이런 사람들은 물건들을 처리하는 능력이 없다. 마음의 공허와 집착, 외로움 등을 아파할 줄 알아도 벗어날 엄두를 못 내듯이 말이다.

다행히 모자는 물건들을 치우기로 결심했다. 여러 명이 도와서 버릴 것과 기증할 것과 간직할 것을 정리해 냈다. 그나마 조그마한 아파트여서 며칠 만에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개인 주택의 경우는 사정이 더 복잡했다. 물건 모은 세월이 10년, 20년이니 치우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한 달 걸릴 수도 있고 그 이상일 수도 있는가 보았다.

집안을 온통 자신만을 위한 물건들로 채워 남편과 아들들을 불행하게 만든 여인도 있었다. 그녀는 성격까지 예민하여 물건에 대한 타박을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남편이 물건을 포기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하고, 아이들이 물건도 이혼도 힘들어한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달라지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지상은 가족의 공간, 지하는 그녀의 공간으로 타협을 보았다. 물건 자체가 스트레스인 남편은 절반의 변화라고 말했다. 회복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교통사고로 정신지체 장애를 가지게 된 큰아들이 그녀에겐 감당키 힘든 아픔이었던 것 같다.

자식들이 독립하여 텅 비어버린 집에서 숨만 쉴 뿐 살기를 포기한 여인도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쓰레기를 치우지 않았다. 냉장고 안까지 쓰레기가 가득했다. 발 디딜 틈 없이 각종 쓰레기와 집안 기물들이 뒤섞여 있고 그 틈으로 벌레가 기어 다녔다. 식구들과 같이 살지 않는 또 다른 할머니 집은 온통 사진과 예쁜 물건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것들이 천정 가까이까지 쌓이니 예쁘기는커녕 창고보다 더 한심하고 쓰레기 집하장보다 더 어지러웠다. 그 속에 생매장된 여인들이 울고 있었다. 외로워하고 있었다.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각종 상품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데다 쇼핑을 미덕으로 여기도록 장려되어 온 미국의 소비문화도 여인들이 병드는 데 주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들에 대한 치료가 시작되었다. 도우미는 그들이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쓰레기부터 찾아서 버리게 했다. 그런 다음 아주 작은 물건이라도 필요한 것인지, 기증할 것인지, 버릴 것인지를 일일이 물어보았다. 앨범을 같이 들여다보면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시켜 주기도 했다. 바겐세일에서의 충동구매, 가지고 싶은 물건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줄이도록 도왔다. 물건에서 사람으로 시선을 옮기도록 도왔다. 여인들의 집이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갔다.

그걸 보면서 핸드백에 대한, 중독에 가까웠던 내 집착이 떠올랐다. 젊었을 적 구두나 옷에 강한 집착을 보인 친구도 있었지만 나는 핸드백이나 지갑을 보면 그곳이 시장이든 백화점이든 떠날 줄을 몰랐다. 미국 와서도 그 버릇은 사라지지 않았다. 핸드백이 없어서가 아니라 내 맘에 드는 핸드백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충동구매를 한 적도 있고, 집착의 힘이 내 이성을 지배하는 순간, 가방을 움켜쥔 적도 있다.

가방뿐이겠는가. 중독이란 말은 어디에도 붙일 수 있는 접미사 같다. 쇼핑 중독, 일 중독, 종교 중독, 교제 중독, 수다 중독, 전화 중독, 운동 중독,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학벌 중독, 신분 중독 등. 중독은 불건강한 의존을 의미한다. 홀로 서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혼자 있어도 진정한 고독을 누릴 수 없고, 온전한 자유도 누리지 못하고 절대자 앞에 제대로 빈 손으로 서지 못할 것이다. 사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정도로 심각한 집착이 아니기에 중독 은 너무 심한 표현일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이들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는 것들이 내 안에 있다.

내 안의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래서 고치지 못했던 버릇을 바꾸어 보기로 했다. 서점에 자주 들러 책을 사는 버릇에는 조금 다른 의미를 부여키로 했다. 사긴 사되, 신문에 소개할 책들을 사고, 필요한 이들에게 선물하기로 했다. 여전히 핸드백은 내 발길을 멎게 하는 힘이 있지만 지나쳐 버리는 일이 쉬워졌다. 일 중독, 인터넷 중독, 드라마 중독, 무엇이든 시작했다 하면 기울어 버리는 중독성(편향?)을 인정하면서 그때마다 나 자신을 가만히 바라본다. 스스로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이다. 아니 나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서이다.

무엇보다 사람 중독, 좋으면 앞뒤 안 가리고 사람, 사람에게 기울어 버리곤 했던 의존적인 나에게 브레이크를 걸었다. 내 감정, 행동, 생각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게 된 것만도 감사하다. 나이 탓도 있지만 믿음 덕이다. 주님의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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