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

세월은 바야흐로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접어든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경은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다. 예루살렘에서 10km 밖에 안 떨어진 작은 동네 베들레헴의 초라한 마구간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고대하던 만왕의 왕 예수 그리스도가 나신다. 그는 꽃마차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시지도 않고, 왕궁도 아닌 초라한 구유에서 홀아비 목수 요셉과 열두 살 처녀 마리아의 사이에서 불미스럽게 세상에 나온다. 지난 수천 년의 시간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조금이라도 성숙하고 분별력이 있어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기를 바라셨던 하나님은 보다못해 그의 독생자를 인간들의 세상에 직접 보내신다. 신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직접 오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완벽한 분별의 모범을 보여 주시려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다.

지역 농부들에게 포도밭을 임대해 준 주인이 수확할 때가 되어 소출을 얻고자 자신의 종들을 계속 보내도 소용이 없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을 보낸 마가복음 12:1-11의 비유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다. 그의 운명은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자신을 죽인 자들을 용서하고 구원하게 되는, 인간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전의 미스테리를 펼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직접 모든 인간들의 본이 되시는 상황이 발생한다. 거룩하고 경외롭고 때로는 두렵기도 한 구약의 하나님이 인간들의 친구요, 죄인이요, 종이요, 형제가 되신다.

문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계획과 인간 세상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컸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공기는 여전히 탁했고, 인간들의 관심은 그저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었으며,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로마 권력의 눈치를 보며 율법주의적인 토대와 아성을 굳건히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본받으려는 자들은 드물었고, 세상에는 오직 율법을 준수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저주받은 자)의 두 가지 카테고리밖에는 없었다. 율법주의자들이 판치는 세상이었다.

30년 간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조용히 성장하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움직이신다. 제자들이 불려지고 세워진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주의 길을 먼저 예비한 세례 요한의 광야에서의 외침이 쩌렁쩌렁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 이곳저곳에서 예수님의 치유와 축사/구마와 말씀 선포가 울려 퍼진다.

때로는 오천 명을 먹이기도 하신다(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5). 사람들에게 비난 받던 세리장이요 부자인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집으로 초대한다. 하지만 『팬인가 제자인가』를 쓴 카일 아이들먼의 책 제목처럼, 이들은 단지 눈앞에서만 열광하는 팬이다. 곧 있으면 예수님을 버릴 자들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행해진다. 지위와 신분에 상관없이 행해진다.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추상에 머물지 않고 현실이 된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하늘에만 계시지 않는다. 세장 사람들과 같이 계신다. 눈먼 자가 눈을 뜨고, 앉은뱅이가 일어서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

새로운 세상이 왔다.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 사람들의 기대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렇지! 우리를 압제에서 구원해 주실 메시아! 예전에 바리새인들이 들려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한 모세 같은 지도자, 여리고 성을 7일 만에 허물어뜨릴 수 있는 능력자!”

그런 예수님께서 유월절 마지막 식사 후 유대 지도자들이 보낸 로마 군인들에게 잡히신다. 어떤 저항이나 항변 없이 어린 양처럼 순순히 결박을 당하신다. 억울해서 보다 못한 베드로가 검을 들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린다. 예수님께서 나무라시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

드디어 제자들의 배반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예상과 추호도 다르지 않다. 첫 닭이 울기 전 베드로는 이름도 모르는 여종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기고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로 인생을 마무리한다(마 27:5). 사람들의 관심 역시 더 이상 유대인 랍비를 향하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가 아니야!” 그들은 대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친다.

땅이 갈라지고, 천둥이 치고, 사람들은 소란하고, 제자들은 자취를 감추고, 온 세상의 빛이 사라진 날, 예수님은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신다. 사람들이 조롱한다.

“그래, 너의 하나님이 내려와서 너를 구원하나 두고 보자!” 예수님의 입에 신 우슬초가 물려지고, 그는 숨을 거두신다.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대속적인 죽음의 현장에 제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성경 저자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간다.

 

하지만 아직 무대의 불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할 이야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 성취가 이뤄지기 전에 관중들을 내쫓을 수는 없지 않는가?

3일째 되던 날 새벽은 여전히 어두웠다. 가장 낮은 자인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무덤 속의 주님을 찾아간다. 죽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장례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계시지 않았다. 대신 천사가 이들을 만나 예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알린다. 두려움에 휩싸인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위로하신다, “두려워 말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정체 모를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눈이 열리고, 마음에 성령의 불이 타오른다.

갈릴리에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신다. 예수님을 부인했지만 한때 절대적인 복종자였던 베드로에게서 예수님은 사랑의 확약을, 그것도 세 번씩이나 받는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이제 베드로는 예전의 좌충우돌 ‘시몬’이 아니라,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라고 불리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의심 많은 도마에게 직접 몸을 만지는 것을 허락하신다. 또한 제자들에게 더 많은 기적을 베푸신다(요 20:30). 예수님이 제자들을 축복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며, 제자들과 그들의 남은 사역을 위해 성령을 보내겠다고 말씀하신다(눅 24:49-51). 성령의 시대가 열린다.

세상의 공기는 여전히 탁하다. 로마제국의 횡포는 갈수록 심해진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여기저기서 핍박을 당한다.

이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솔로몬 행각에 올라서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는 자가 있다. 베드로이다. 그는 어제의 그 비겁한 자가 아니다. 성령 충만한 그가 외친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다른 이에게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행 4:11-12).

드디어 제자들의 시대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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