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이전에 두 번에 걸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하는 곳이 교회이며 세상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의 일상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아침이면 피었다가
한낮이면 사라지는 나팔꽃도
한껏 피었다 지거늘
어찌 내 유일한 인생을
꽃피우지 않으랴!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자신의 유일한 인생을 꽃피워야 할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꽃 피우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특히 구도생활을 해온 영성가들은 그 길을 가기 위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노력했습니다. 그러한 영성가들에게서 공통으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서'입니다.

신앙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시정 한복판, '지금 여기서' 하나님을 찾고 '지금 여기서' 고통과 기쁨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뛰어난 영성가인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찾고자 한다면 자기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 참 자신을 만나고, 세상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우정을 맺고 정의롭게 살고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복음을 전하며 살아야 한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머튼이 말하는 대로 '지금 여기서' 하나님을 찾고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청원이 우리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 실현되는 길입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삶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출발점입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

여호와의 의미는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현존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분에게는 어제와 내일이 없습니다. 영원히 현재로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시공에 갇힌 인간에게 영원은 그토록 바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자 실제입니다. 그래서 오늘만, 지금 이 순간만 아는 분이신 하나님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기도의 다음 청원인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에서도 오늘이라는 현재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소유의 노예가 되어버린 우리들의 사고로는 그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이라는 말을 하루치 양식이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려 하기 때문에 불안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주기도에서 말하는 오늘이란 오늘 하루를 넘어 영원한 현재를 의미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청원은 일상의 영성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성스럽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름 받은 하나님 백성의 삶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입니다. 일상의 영성이 어떤 삶인가를 잘 보여 주는 성경 말씀이 시편 1편입니다.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

시편 1편을 열고 닫는 단어는 길입니다. 인간이 걸어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가 길을 이야기합니다. 불교에는 팔정도(八正道)라고 해서 인간이 걸어야 할 8개의 바른 길이 있습니다. 유교에는 중용의 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복된 인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복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어떤 삶을 사는 사람이 복된 사람일까요? 우리는 특별한 사람들, 소수의 사람들만이 복을 누리며 산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1편의 복된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사람입니다.

한글 성경에선 시편 1편이 "복된 사람은" 이라는 말로 시작하지만 원문에는 '복 되어라! 사람이여'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냥 사람이 복되다는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이어서 복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름답기 때문에 복되고, 유명한 인물이 되었기 때문에 복되고, 박사가 되었기 때문에 복되고,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에 복되다고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한 사람, 성공하지 못한 사람, 못 생긴 사람,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복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 복되다고 말합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복된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에게서 그와 같은 인간관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 자체를 귀하게 보셨습니다. 사람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사람이 당신께 오는 것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에게 주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 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요 8:11)고 하셨습니다. 그녀에게서 인간의 존엄을 보신 것입니다.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구걸하던 장님을 격려하시고 당신께 오게 하시고 치료해 주셨습니다(막 10:46-52). 38년이나 된 실로암 못가에서 꼼짝 못하던 환자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해주셨습니다. 나병 환자에게 직접 당신의 손을 대고 고쳐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손을 내밀어 한 사람씩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치료는 단순히 병만 낫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손길을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시편 1편은 인간의 길과 인간되기를 그친 악인, 죄인, 오만한 자의 길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어떤 길이 평화의 길인지 혹은 불행의 길인지, 생명의 길을 향해 걷고 있는지 아니면 죽음의 길을 향해 걷고 있는지를 판단하게 해줍니다.

1절의 동사들을 보면 인간이 어떻게 길에서 벗어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동사는 '좇는다(걷다)', ‘서다(머물다)' '앉다'의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는다는 것은 악인의 간계에 넘어가 악인들과 함께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은 죄인의 길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것은 오만한 이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음모를 꾸미는 주모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라는 번역은 원문과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꾀라고 번역된 단어는 충고입니다. 악인의 충고, 그것은 나쁜 사람의 꼬드김이 아니라 세상의 지혜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죄인의 길 또한 세상에 푹 빠져 사는 사람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만한 자의 자리 또한 세상의 성공과 돈에 빠져 교만해진 사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악인의 꾀는 방법이 될 수 없고, 죄인의 길 또한 길이 될 수 없습니다. 6절에서 보듯이 죄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게 하는 길입니다. 인간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 안에서 걸어갑니다. 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에게 율법은 곧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죄인의 길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자기 멋대로 가는 길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2).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여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율법을 구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는 참된 인생의 비결이라고 믿었습니다. 아바 아버지이시고, 선한 목자이신 그분께서 율법을 통해 평화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은 선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었습니다.

과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3).

시편 기자는 인간을 나무에 비유합니다. 나무는 대지에 뿌리를 깊이 내려야 살 수 있습니다. 사람 또한 창조주 하나님께 깊이 뿌리 내려야 살 수 있습니다. 나뭇잎은 하늘을 향해 있고 뿌리는 땅에 박혀 있습니다. 나무처럼 인간의 머리는 하늘을 향해 있고 두 다리는 땅 위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인간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존재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삶을 사는 사람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2절과 3절 말씀을 통해 신앙생활의 두 가지 기본 요소를 배울 수 있습니다. 2절은 내면적 차원을 가리키고, 3절은 외면적 차원을 가리킵니다. 이 두 가지는 영성 생활의 근간을 이룹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하나님 말씀이 내면화되고, 내면화된 말씀으로 일상을 살면서 과실을 맺을 때 참된 형통이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악인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4).

바람에 나는 겨는 타작, 즉 마지막 날 심판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알곡과 겨가 상징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무거운 알곡은 실재를, 가벼운 겨는 허상을 가리킵니다. 돈과 성공과 명예와 같은 것들은 실체처럼 보이지만 모두 허상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는 삶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허무합니다.

의인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의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5).

5절에서 의인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의인은 죄인과 대립하는 단어이지만 의인이 따로 있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의인과 악인의 구분은 없습니다. 다만 인간의 길을 걷느냐 걷지 않느냐에 따라 의인과 악인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의인이란 인간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회심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길을 걷게 합니다. 창조 때부터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길, 그것이 바로 인간의 길입니다. 죄인은 회심하기 전까지 인간의 길을 걷지 않지만 회심하면 다시금 인간의 길을 걸어 시편 1편이 선언하는 복된 사람이 됩니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6).

의인이 선택한 길은 그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악인이 택한 길은 그를 멸망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의인이 택한 길은 그를 좁은 문으로 인도할 것이고 악인이 택한 길은 그를 넓은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고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여기서 멸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벌이 아닙니다. 6절 말씀에서 첫 문장의 주어는 여호와이지만 둘째 문장의 주어는 악인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돌보십니다. 우리가 인간의 길을 걷고자 하면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축복해 주시고, 좌절과 고통을 생명의 원천이 되게 해주십니다.

하지만 악인의 경우는 다릅니다. 주어가 하나님이 아니라 악인의 길입니다. 인간의 길이 아닌 길을 걷는 악인은 스스로 멸망을 부르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그를 멸망에 이르도록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이 걸어가는 길은 본래 가야 할 길이 아니기에 그 종국이 멸망인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본향은 천국입니다. 나그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길을 걷는 것입니다. 바른 길을 걷지 않으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유일한 길

그런데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길을 걸으시고 길 자체가 되셔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길을 걸으셨고 그 길에 당신의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목적지를 향해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좁은 길을 따라 찍혀 있는 당신의 발자국을 행여 놓칠까 봐 그분은 성령님이 되셔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요 14:6) 말씀하신 그분이 우리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유일한 길로 선언하셨습니다. 그분을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에게 갈 수 없습니다(요 14:6).

우리의 일상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일부만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일상, 즉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의 뜻을 따를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청원을 실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할 장소는 우리의 일상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고 말했습니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 이 땅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약속의 땅이 될 것이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가장 인간다우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우리의 청원은 우리 자신을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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