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하나님 나라

성경은 일차적으로 한 백성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행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온 인류에 관한 기록이며, 온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한 기록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인간 실존에 관한 기록입니다. 성경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삶의 조각들을 모아 하나로 묶어 일관되고 의미 있는 이야기로 만드시는 것을 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구심점이 존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제일 먼저 당신이 누구인가를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신 5:6).

이 이야기를 이해해야 비로소 그 다음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7).

성경에서 우상숭배에 대한 정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만 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정기적으로 나누기 위해 일상의 삶 곳곳에 그것을 전하고 배우는 시간들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또 그것을 나누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이는 백성입니다.

"우리가 옛적에 애굽에서 바로의 종이 되었더니 여호와께서 권능의 손으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나니 곧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전에서 크고 두려운 이적과 기사를 애굽과 바로와 그 온 집에 베푸시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우리에게 주어 들어가게 하시려고 우리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시고"(신 6:21-23).

이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모험의 길을 가고 있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이야기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그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본 도구이며,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복음서 기자들도 예수님 이야기와 그분의 삶에 매혹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우리는 우리 삶의 의미와 통일성을 깨닫습니다. 우리 인생이라는 작은 이야기가 하나님의 큰 이야기에 속에 포함될 때 우주적이고 영원한 의미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뜻

이야기의 중심에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은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들을 위한 청원이면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놀라운 행위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 자체가 복음이며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 이 땅에 마지막으로 머무신 동안에도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복음은 단순히 개인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구원 받은 하나님 백성 전체와 온 인류 그리고 피조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나의 모든 것을 규정하고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따를 때 우리의 삶이 가장 행복하고 가치 있으므로, 하나님의 뜻이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복음을 듣고 결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알고 느끼고 깊이 사랑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하나님께서는 사나흘 늦어도 열흘이면 통과할 수 있는 광야를 40년 동안이나 걷게 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2-3).

하나님은 곡선으로 직선을 그리시는 분입니다. 광야의 길은 하나님의 백성을 양육하시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신앙이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고 언어의 표현을 넘어섭니다. 우리가 평탄한 길을 걸어갈 때에만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값싼 신앙에 불과합니다. 참 신앙은 어둠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는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자신을 맡기는 온전한 의탁 안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보다 우리 자신의 생각과 필요에 집착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이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길에는 천재가 없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걷는 것입니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서로 사랑하며 걷는 길이 바로 신앙의 길입니다.

 

광야와 약함의 신학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광야 길을 걷습니다. 시련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정화됩니다.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는 감당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무방비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을 가집니다. 그 길에서 주님을 새로 만납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계심을 깨닫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사람들은 죄와 무능으로 절망의 심연에까지 내려갔으며, 희망이라고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지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지도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켰던 모세는 살인자였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 하나를 홧김에 때려죽였습니다. 그 일로 그는 애굽을 떠나 미디안 광야에서 오랫동안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불붙는 떨기나무 앞에 섰을 때 그에게 큰 임무를 맡기기 위해 말을 건네는 하나님께 먼저 자신의 죄와 무능함을 아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다윗 역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이라는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밧세바가 임신하자 그는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다윗 또한 자신의 죄를 직면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신의 무능함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신약에 와서도 이와 같은 성경 패턴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는 믿음을 고백한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예수님을 못 가게 막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사단이라 부르시며 물러나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마침내 폭도들에게 잡히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감람산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26:35)라고 거창하게 맹세했지만 자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먼저 체험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다음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는 참람한 심정으로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마 26:75)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기자는 신약의 위대한 인물이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잘못을 변명하거나 감싸 주지 않았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죄 많고 잘못 많은 사람들을 사도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을 토대로 당신의 교회를 설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훌륭하게 증언한 것처럼, 이들도 하나님의 자비를 알리는 데 적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죄와 무능함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반석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 반석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고 오직 믿음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한계와 무능함을 처절하게 경험한 이후에야 비로소 그는 주님의 양을 먹이는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바리새파 출신으로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한 전형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갈 1:14).

그는 바리새인들이 추구하던 이상을 존중했으며, 계명과 율법들을 정확히 지켰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저앉게 되었으며 그가 쌓아온 삶의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에서 그리스도께서 몸소 그를 변화시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그의 견해는 바로 이 체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회심한 후에 어떤 병에 시달렸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12:7). 그는 분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로 세워진 사람인데, 사단의 사자가 함께 있습니다.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라는 말을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 할지라도 자고해지는 순간, 우리는 길을 잃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병에도 불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성경학자들의 주석에 의하면, 바울이 감당해야 했던 그 병은 활동력을 약화시켰지만 그를 겸손하게 만들었습니다.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병을 이용하여 바울로 하여금 해방과 구원에 대하여 새롭게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점을 오히려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던 병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에 자신을 더욱더 맡겼으며,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물게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약함의 신학이 그런 바울을 통해 울려퍼졌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9).

하나님의 힘은 우리의 힘이 약해질수록 더 강하게 작용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더 강해지고, 세상의 인정을 받고,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풀기 위해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옳게 살 수 있도록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할 때, 하고자 하는 일을 스스로 잘할 수 없을 때,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할 때, 애통해 할 때, 사탄이 파견한 악의 세력이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병과 고난을 통해 배웠습니다. 마침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함을 기쁨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10).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함에 의해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도달하려는 유혹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품에 자신을 내맡겨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올바르게 자신을 지탱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성취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연약한 사람들을 자비롭게 대하신 반면, 바리새인들을 강하게 질책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완벽해지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런 열심을 가지고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계명들을 완벽하게 준수하려고 온 힘을 기울이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찾기보다 자기 자신을 더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아니라 정의와 율법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지만, 정작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설정한 규칙과 이상을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계명 준수에 얽매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간과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

완벽한 인간의 행위와 위대한 인간의 성취는 하나님 찬양으로 위장해도 결국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오만함으로 이어집니다. 허무한 자기 과시일 뿐입니다. 자신의 탐욕을 하나님으로 치장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얻어맞고, 상처받고, 부서진 마음은 하나님을 향합니다. 자신의 죄가 커서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원상복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의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또한 하나님의 자비를 담아 역지사지할 수 있는 긍휼의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상에 대해 절망하고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 주님과 동행하는 길만이 오직 유일한 희망임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천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준비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필요와 욕망에 대해 죽었기에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피조물의)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21).

로마서에서 엄청난 비밀을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것은 피조 세계 전체를 변화시키는 도화선입니다. 그분의 뜻은 반드시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시기를 결정하고 그 방법을 결정하는 엄청난 일에 자신의 죄와 무능에 절망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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