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태복음 6:5-13).

의 위험성

영적 진보를 이룬 위대한 영성가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우리가 피해야 할 영적 장애물입니다. 그런 장애물들은 우리의 자아를 가치 있게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것들입니다. 좋은 출신 배경이나 학벌, 뛰어난 능력과 빼어난 외모도 영적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을 교만하게 하는 가장 큰 영적 장애물은 바로 부(富)입니다.

부는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외모가 형편없는 사람도 나이가 많은 사람도 부가 있으면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을 수 있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도 부가 있으면 능력 있는 사람들을 부릴 수 있습니다. 많은 것들을 소유할 수 있고 즐길 수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도 꼼짝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부가 전지전능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서는 무소불능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4, 막 10:25, 눅 18:2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귀에는 이러한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부가 있어야 자선도 베풀고, 하나님 나라의 일도 하지 않겠느냐는 말은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 마옵소서"(마 16:22)라고 말하는 베드로와 같습니다. 그만큼 부의 영향력이 큰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무시한 채 자신의 마음을 신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적으로 실족하고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욕망을 좇아 사단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부를 피해야 합니다. 부를 피하는 것이야말로 참된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부를 향한 우리의 마음을 가난으로 향하게 하는, 그래서 가장 먼저 구해야 하는 기도입니다.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부는 우리를 눈멀게 합니다.

부는 우리를 눈멀게 하여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은 우리가 보지 못하게 되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부가 우리를 어떻게 눈멀게 하는가를 보여 주십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가 그것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하는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 고민하나이다"(눅 16:19-24).

이 비유는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지옥에서 놀란 부자'라는 제목이 더 합당한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후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부유한 사두개파 사람들을 향해 이 이야기를 하신 듯합니다. 한 부자가 커다란 저택에 살면서 날마다 잔치를 벌이며 즐겁게 살아갑니다. 신분에 걸맞게 고급 자색 옷을 입고 비싼 속옷이었던 애굽산 고운 베옷을 입었습니다. 그는 강도도 아니고 사기꾼도 아닙니다. 그가 불법으로 재산을 모았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다만 그는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는 공정하고 점잖은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거지가 자신의 대문에 와서 머물거나 기웃거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부자의 집 문 앞에 피부병으로 고통당하는 불쌍한 거지가 누워 있습니다. 그 거지의 이름은 나사로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이름이 언급된 유일한 사람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날마다 그는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 집의 만찬에 참석한 손님들은 중간에 음식 찌꺼기를 던집니다. 당시 그 지역 관습에 의하면 식사 시 사람들은 냅킨 대신 빵을 잘라 그것으로 손이나 입을 닦고 그것을 식탁 아래로 던졌습니다. 나사로가 집어먹은 것은 바로 그렇게 던져진 빵 조각이나 음식 찌꺼기였습니다. 때론 선심을 쓰기 위해 침을 뱉은 음식 덩이를 던져주기도 했습니다. 거지를 뜻하는 헬라어는 그래서 '뱉다'라는 말과 관계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향연에 참여한 사람들이 침을 뱉어 조롱한 사람이었습니다. 어쨌든 부자들의 식탁 밑에 있는 거지는 불편한 존재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따르고 지키는 사두개인들은 그 일을 일종의 자선으로 생각하고 거지들을 상 밑에 머물게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나사로에게 개들이 다가옵니다. 개들도 상 밑으로 던져지는 음식들을 받아먹었을 것입니다. 개들은 피부병을 앓고 있는 나사로를 불쌍히 여겨 그의 상처를 핥아 주었습니다. 개들이 핥는 것은 미워하는 동작이 아닙니다. 짐승들은 상처가 나면 상처를 핥습니다. 나사로의 상처를 보고 개가 핥아 주는 행위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개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 버림받은 이방인을 상징합니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뒤집히고 있습니다. 부유하고 경건한 사두개인들은 거지에게 자선을 베푼답시고 음식을 닦은 빵 조각이나 침 뱉은 음식을 던져 주는데 처참한 처지에 놓여있는 나사로에게 개들이 사랑을 표합니다. 개들은 부자들처럼 침을 뱉지 않고 침으로 상처를 치료해 줍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제대로 본다면 참으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비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야기 중간에 엄청난 반전이 일어납니다. 부자는 지옥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당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던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갑니다. 이 대목에서 누가복음 첫 부분에 나오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이 떠오릅니다.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1:53).

예수님께서 들려 주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부에 눈이 멀어 율법 정신을 망각하고 희년 정신을 부정했던 부자는 끔찍한 종말을 맞았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에 나오는 큰 구렁은 그 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었는가를 상징합니다. 그것은 동시에 그가 살아 있을 때 곁에 있었던 나사로와 얼마나 큰 차이를 두고 있었는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부자와 거지 사이에 건너갈 수 없는 큰 구렁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 비유는 부자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의 끝은 아직 살아 있는 다섯 명의 부자 형제들에게로 향합니다.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27-31).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부자의 형제들은 어릴 때부터 율법과 선지자들의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거기에 담긴 사랑과 희년의 정신에 대해 그들은 이미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것을 행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의 눈이 먼 것입니다. 부가 그들을 눈멀게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아무리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가 말 해도 그들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호합니다. 사랑과 희년을 거부하고 부에 눈이 멀어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고 그들과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을 두는 부자는 음부에 떨어져 불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부는 눈을 멀게 합니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 연락에 빠져 지옥으로 가는 길을 즐겁게 달려가게 합니다. 지옥이 어디 있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지옥은 바로 부에 눈 먼 사람들의 마음에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청원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를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어리석은 부자

부는 저주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부가 저주를 불러오는 경우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부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진정한 관계를 경험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보다 더 큰 저주가 있을까요? 우리는 술 담배를 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병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저주들의 원인이 되는 부를 피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눅 12:13-21)를 통해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율법에 관한 조언을 요청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형이 유산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인색한 형을 꾸짖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간섭하기를 거절하시고 어리석은 부자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십니다. 유산 분배 문제로 속상해 하는 그에게서 탐욕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한 농부가 많은 곡식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곡간을 더 크게 짓고 곡식을 쌓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준비합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와 어리석다고 하시면서 그의 영혼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반전을 요약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리라"(21).

이 남자는 여분의 곡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주어 사랑을 실천하는 대신에 그것을 비축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기도의 정반대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처신의 동기가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준비해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

그러나 즐거운 잔치가 벌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 집 문을 두드리시고 그를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하십니다. 일상생활에서 "어리석은 자"라는 말은 우둔하거나 분별력이 떨어진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자 농부는 탐욕의 덫에 걸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16절부터 19절까지 네 구절로 이루어진 짧은 비유 속에서 어리석은 부자는 '나'라는 단어를 11번이나 사용하였습니다. 오직 ‘나’만의 행복한 삶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의 생명을 앗아가십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일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극악무도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전형적인 상류층 부자 가운데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미래를 위해 더 많이 준비하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이 이야기는 한 부자의 탐욕에 관한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삶의 연약함에 대해, 영원한 가치가 있는 참된 재물에 관해 가르쳐 줍니다. 이 어리석은 사람이 부의 노예가 되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 그의 영혼에 저주를 불러온 것입니다. 그는 자기를 위해 재물을 쌓는 일에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되었습니다. 또 한 번 역전이 일어납니다. 이 땅에서 재물을 축적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하여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재물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 부자들은 넉넉하게 나누고 베풉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부는 저주에서 자신의 영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 하니라"(16).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은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입니다. 경제적 성공이 가치를 결정한다는 생각이 이 시대를 휘젓고 있습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 경제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인생이 소유에 의해 판단되고 결정됩니다. 풍족한 소유는 풍족한 삶과 동의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행과 감각적 풍조와 상업광고가 주도하는 소비주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명확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거꾸로 뒤집힌 나라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인 가치를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그곳에서는 사람의 가치가 소유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용기 있게 가난의 길을 택하는 사람이 추앙받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 안에서 탐욕과 이익 추구와 특권은 버려야 할 쓰레기입니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더 큰 곡간을 짓는 것은 탐욕 그 자체이며 저주를 불러오는 그릇된 선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부로 인한 저주로부터 해방된 사람입니다.

가난의 유익

부를 피하는 것은 부가 위험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부의 반대인 가난의 유익이 있습니다. 가난은 우리를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여 상처를 받습니다. 무능력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가난을 권하고 칭송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상처받고 부서지고 한 바로 그 자리, 그 순간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기회이다." 헨리 나우웬 신부의 말입니다. 가난은 우리로 하여금 상처받고 부서지게 합니다. 질병이나 고통이나 역경은 모두 가난의 한 모습들입니다. 그런데 가난의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들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해결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말로만 믿는다고 해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가난해져야 합니다.

가난은 우리를 연약한 상태에 놓이게 만듭니다. 우리가 약한 존재임을 알게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상황이나 자기 자신을 더 낫게 만들 수 없음을 체험하게 되고, 자신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내맡겨진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모든 노력들을 접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주워 먹는 것밖에 한 일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의인의 회중에 들 수 있습니까? 자선을 베푼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한 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한 일이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그의 가난과 인생의 상처들이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하고 무가치한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내맡기도록 그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의탁했습니다.

부를 피하십시오. 부에 대한 욕망까지 버리십시오.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십시오. 그곳이 바로 우리가 찾아야 할 안식처이며 그곳이 우리가 구해야 할 진정한 소망의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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